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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우 Mar 22. 2022

쌀밥에 배춧국

배춧국

책방 문을 열자마자 오래된 단골 고객이 방문했다. 일전에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한 마을의 화제 인물이자, 가톨릭 교우로서 아들뻘 되는 나를 항상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분이다. 


한 번 말씀을 시작하면 방언 터지듯 끝을 보는 스타일이라 웬만하면 화제를 만들지 않는데, 잠시 긴장의 끈을 놓았다가 방송 본 것을 들키고 말았다. 결국 한 시간 가까이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시작해 방송의 영향력과 편집의 위험성에 대해 ‘대화’라 쓰고 ‘연설’이라 이해하는 말씀을 들었다. 


특별히 유익하지는 않았으나 마음에 남은 한 마디는, 혼자 먹고사는데도 삼시 세끼 때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씀이었다. 방송에서는 나무로 군불을 피워 식사를 준비하셨으나, 사실은 가스레인지도 있고 전기도 환히 잘 들어온다는 말씀에 나는 괜히 안도했다.


내가 운영하는 가평군 설악면의 작은 책방 북유럽(Book You Love)


춘천의 한 대안학교에서 말 안 듣는 애들과 두 시간 수업 씨름하고 돌아오며 오늘 뭘 해먹을까 고민했다. 당시 격주 화요일마다 아내가 책방에서 현대미술 스터디를 했던 터라 딸과 둘이서만 먼저 식사할 예정이었다. 책방에 들러 도무지 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강아지 '하이'를 데리고 나가 의도치 않은 긴 산책을 하다 보니 날이 어두워졌다. 약속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한 딸은 친구들과 떡볶이로 이미 식사를 마친 상태라고 했다.


별 일도 아닌데 괜히 저녁 스케줄을 망친 것 같아 속으로 짜증이 났다. 기다리는 사람 생각해서 뭘 먹고 늦게 올 것 같으면 문자라도 줘야지. 짐짓 근엄하게 말했지만 아빠가 삐쳤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할 딸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 혼자 먹자고 밥 차리기가 뭐해 굶을까 하다가, 내일 출장 갔다 늦게 올 텐데 먹을 게 마땅치 않으면 식구들도 짜증이 날 것 같아 얼른 밥을 안치고 배추 몇 잎을 뜯어 국을 끓였다. 


문득 오늘 다녀가신 고객 말씀이 떠올랐다. 혼자 먹더라도 끼니 때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잘나건 못나건, 부자건 가난뱅이건, 하루 세끼 먹는 것만큼은 공평하다고 누군가 말해준 적이 있다. 사는 데 있어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먹는 것이니 얼마나 중하냐고 말해준 이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 뭐하고 사나 싶지만, 그래도 밥상을 정성껏 차릴 때만큼은 ‘뭔가’를 하는 듯 뿌듯해지곤 한다. 먹는 것이, 먹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일’, 그것도 ‘중한 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배춧국을 끓이고 새 밥을 말아 한 술 뜨니 기분이 나아졌다. 사실 짜증이 난 건 딸이 미리 연락을 안해서가 아니라 하필 그때 배가 고팠던 게 이유였다는 걸 깨달았다. 먹고만 살아서야 되나 싶은 게 늘 걱정이지만, 일단은 먹고사는 게 기본이라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밥을 만 배춧국 한 대접. 든든한 한 끼.


배춧국은 만들기 손쉬운 음식이다. 내게 단 하나의 관건은 양을 조절하는 것뿐이다. 한 번 끓이면 몇 끼를 먹곤 하던 어린 시절 기억에 기대어 잔뜩 준비했다가는 내내 독박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국을 싫어하는 아내와, 같은 국을 두 번 이상 먹지 않는 딸의 입맛을 고려해 딱 한 끼만 먹을 분량으로 끓여야 한다.


재료부터 단순하다. 배추 겉잎 몇 장과 된장 크게 한 숟갈. 다진 마늘 약간과 송송 썬 파만 있으면 충분하다. 먼저 된장을 풀어 물을 끓인다. 끓는 물에 된장을 풀어도 된다. 깊은 맛을 내기 위해서는 멸치를 넣고 끓여도 되겠지만, 가끔은 조개를 넣고 끓이면 더 좋겠지만, 다시마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다시마를 넣을 경우 처음부터 넣고 물을 끓이다가 펄펄 끓기 시작하면 곧바로 건져낸다. 특유의 끈적임과 텁텁함이 남지 않도록. 된장 물이 우러나면 미리 썰어 둔 배추를 넣고 숨이 죽을 때까지 마저 끓인다. 싱겁다 싶으면 소금이나 간장으로 적당히 간하면 끝. 약간의 다진 마늘을 넣어 개운함을 높이고 송송 썬 파를 조금만 넣어 식감도 살린다. 가끔은 정신이 번쩍 들도록 매운 고춧가루를 섞어도 좋겠다.


나는 배춧국에 밥을 말아 먹을 땐 김치와 조미김만 있어도 충분하다. 한 숟갈 푼 국밥 위에 김치를 얹거나 국에 조미김을 살짝 담갔다가 먹으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다. 


든든한 한 끼라는 뜻으로 '이밥에 고깃국'이라는 말이 있다. 입쌀로 지은 따뜻한 밥과 고기를 넣고 끓인 든든한 국. 따뜻하고 든든한 한 끼를 뜻하는 말이다.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는 내게는 쌀밥에 배춧국이면 충분했다. 따뜻하고 든든한 한 끼, 그 넉넉한 포만감.


조개를 넣으면 더욱 깊어지는 국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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