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만두가 생각난다. 만두를 빚을 때마다 먹을 때마다 엄마가 떠오른다. 만두는 언제든 엄마를 추억하게 해주는 음식. 엄마와 함께 했던 수많은 장면에 만두가 있다. ‘소울 푸드(Soul Food)’가 그리움이 더해진 음식이라면, 잊고 있던 시간을 일깨우는 음식이라면, 내겐 만두가 그러하다.
열 살 무렵부터 엄마를 도와 만두를 빚었다. 엄마는 백오십 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한 키에 사십 킬로그램을 오르내리는 유난히 작은 체구로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손이 컸다. 평생 독박 가사 노동에 시달렸으면서도 때마다 철마다 절기마다 무엇이든 잊지 않고 푸짐하게 음식을 마련했고, 넘치면 이웃과 나눠 먹기를 즐겼다.
만두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두를 먹는 날이면 대야로 써도 될 법한 큰 양푼에 소가 한 가득이었다. 이불 밑에 진작 준비해둔 반죽도 축구공만큼이나 컸다. 엄마는 반죽을 뚝뚝 떼어 도마 위에서 길쭉하게 말아 숭덩숭덩 썰고 밀대로 쭉쭉 밀어 피를 뽑았다. 피가 쟁반 위에 수북이 쌓이면 그제야 형과 내가 바짝 붙어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시작은 놀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찰흙을 빚듯 재미삼아 시작한 만두 빚기를 엄마는 전혀 말리지 않았다. 남자가 부엌에 드나들면 ‘고추 떨어진다’는 말을 모두가 서슴없이 내뱉던 때였다. 엄마도 내 국민학교 시절 내내 우리 형제의 부엌 출입을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독 만두만큼은 두 아들에게 함께 빚기를 권하곤 했다.
처음에는 너무 서툴러 시간도 오래 걸리고 모양도 엉망진창이었다. 엄마처럼 동그랗게 만들지 못해 반달처럼 반만 접는 모양으로 겨우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살 터울의 형은 나보다야 변변했으나 그럼에도 소를 너무 적게 담거나 넘치게 담아 모양이 들쭉날쭉했다.
엄마는 손이 빨랐다. 형과 나, 두 명이 달려들어 빚어도 엄마가 뽑아내는 만두피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때쯤이면 엄마도 도마를 치우고 만두를 빚었다. 대충 하는 것 같은데도 엄마가 빚는 만두는 예쁘고 야무지고 탱탱했다.
엄마가 더 이상 만두 빚기를 거들지 않아도 된 것은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어느덧 형과 나는 만두 빚기에 있어서만큼은 빠르고 야무진 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엄마로부터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갈 곳이 늘어났고 만날 사람이 많아졌고 할 일이 쌓였다. 결혼을 하면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아이를 낳으면서 책임감이 커졌다. 엄마를 만나는 회수는 시간의 흐름과 정확히 반비례했다. 수시로 전화할 때도 있었지만, 한동안 무소식으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가끔씩 만나 만두를 빚었고 함께 나눠먹곤 했다. 명절이라서, 신 김치가 많아서, 그냥 만두 생각이 나서, 우리는 만두를 먹었다.
엄마의 만두를 마지막으로 맛본 건 엄마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이었다. 설 전날 이른 아침, 댁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이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쓰러졌으니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뇌출혈이었다. 중환자실에 옮겨진 엄마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의사는 손 쓸 방법이 없다고 했다. 면회 시간은 제한되었고 우리는 중환자실에 엄마를 남겨두고 병원에서 멀지 않은 엄마 댁으로 돌아와야 했다.
엄마가 없는 허전한 집은 설을 준비한 흔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부엌과 냉장고 안에는 전이며 국이며 고기며 나물이며 약밥까지 음식이 한 가득이었다. 직전 해 봄 오래 앓던 허리 수술과 재활을 거친 후 지난 가을부터 과하다 싶게 에너지가 넘치던 엄마였다. 그래서인지 이번 설에는 유난히 준비한 음식이 많아 보였다.
오전 내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지만 식구들은 모두 식욕이 없었다. 그저 슬픔과 충격 따위를 침묵 속에서 삼킬 뿐이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엄마 댁에 돌아온 이후부터 쏟아지는 잠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한쪽 구석에 모로 누워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제법 흐른 듯했다. 몽롱한 정신을 수습하고 나자 방 한쪽에서 만두를 빚고 있는 형이 보였다. “뭐하는 거야?” “다 빚었어. 우리도 뭐 좀 먹자.” 형의 옆에는 이미 소가 바닥난 양푼이 놓여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형은 엄마가 해놓은 반죽을 밀어 피까지 직접 만들며 만두를 빚어 놓았다.
형은 부엌 들통에 있는 국물을 이용해 만둣국을 만들었고, 아버지까지 세 사람이 밥상 앞에 모여 앉았다. “맛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형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다독이며 숟가락을 쥐어 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만두를 먹었다.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형이 참 형 같다고 느껴졌다. 집안의 문제 인물이었던 형은 그때까지 내내 엄마에게 의지해 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형에게 마음도 곁도 주지 않았다.
그날의 만두는 엄마의 마지막 만두였으며, 또한 형이 내게 해준 처음이자 마지막 음식이었다. 엄마는 쥐어준 손녀의 손을 힘껏 잡았던 것 빼고는 이틀 내내 잠들어 있다가 조용히 세상과 작별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엔 형도 엄마 곁으로 떠났다. 엄마가 만으로 예순아홉 살, 형이 마흔세 살 때였다.
요리가 손에 익은 후 가장 간절했던 음식은 단연 직접 만들어 먹는 만두였다. 살림을 맡기 전 몇 번의 명절을 거치며 아내의 도전으로 만든 적이 있지만 대실패를 경험하고는 좀처럼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시 아내가 만든 만두는 지나치게 싱겁고 밍밍해 먹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첫 술을 뜨면서 이 낭패를 어떻게 수습할지 난감한 눈빛을 교환하던 때가 떠오른다.
만두가 더욱 간절했던 건, 내가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도 컸다. 직접 만들지 못하면 바깥의 힘을 빌리면 그만이건만, 구할 수 있는 채식 만두는 몇 종류 되지 않았고 더구나 엄마가 해주던 만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나는 한두 차례 소를 직접 만들며 실패를 경험하고서야 뒤늦게 엄마 손맛의 비결을 알게 되었다. 소를 버무리고 있는 내게 아내는 지나가며 말했다. “엄마 부엌, 제대로 안 들어가 봤지? 미원을 대접에 부어넣고 쓰셨어. 그거 겁나 때려 넣으시더라고. 그럼 맛 날 걸?” 조미료를 쓰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나중에 굴 소스를 넣고 소를 만드니 과연 엄마표 만두와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었다. 지금은 굴 소스 대신 조금 과하다 싶게 양념을 넣는 방법을 쓴다.
익은 김치 반포기의 물기를 충분히 짠 후 0.5~1센티미터 간격으로 다진다. 김치 통에서 꺼낼 때 소를 털어내긴 하지만 굳이 깔끔하게 걷어내진 않는다. 데친 숙주나물과 물기 뺀 두부 두 모, 잘게 썬 부추도 넣어주고, 당면은 충분히 불린 후 가위로 잘게 끊어 포함시킨다. 여기에 후추 넉넉히, 간장 두어 국자, 소금 반 큰 술, 다진 마늘 한 큰 술까지 넣어 버무리면 소 완성. 굴 소스가 있다면 간장 한 국자 대신 넣어도 좋겠다.
당면을 끊는 물에 삶아 물기를 뺀 다음 간을 먼저 하는 분들도 있는데, 괜한 수고가 아닌가 싶다. 어차피 물에 불리면 충분히 탱탱해지고 만두를 찌거나 삶을 때 같이 익기 때문이다.
피는 시중에 파는 왕만두피를 쓴다. 이 정도 양이면 대략 만두 150알 정도를 빚을 수 있는데, 왕만두피 5개 정도가 필요하다.
고기를 먹는 아내와 딸을 위해서는 다진 돼지고기를 넣은 만두를 빚기도 한다. 다진 고기 한 근을 사서 소주와 후추, 다진 마늘로 밑간을 한 후에 절반은 위의 소에 포함시키고, 절반은 부추만 섞어 고기만두를 빚는다. 몇몇 지인으로부터 호박만두가 맛있다는 말씀을 듣고 소금에 살짝 절여 물기를 뺀 호박에 후추와 다진 마늘로 양념해 만두를 만든 적이 있으나 개인적으로 그리 놀라운 맛은 아니었고, 식구들도 시큰둥했다.
가지런히 빚은 만두는 바로 쪄서 먹고 남은 것은 냉동해 두었다가 생각날 때 국으로 끓여 먹는다. 끓는 다시마 국물에 만두를 넣은 뒤 소금으로 간하고 파만 넣으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