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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Sep 28. 2024

<붉은 풍차>

  아침에 사무실에 들어서자 동료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근 한 달 여 동안 본부 관계자들이 쏟아부어준 업무로 인해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 거기다 야근까지 이어져서 녹초가 되었었다. 모두들 그 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던 시간들을 이제 모두 떨쳐 버리고 나왔는지 여유들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 일을 어떻게 마쳤을까 의아해할 정도였다. 아직은 내심들 고단하고 피곤할 터인데 단지 그 일을 마쳤다는, 그래서 자유스러워졌다는 이유만으로 얼굴마다 잃어버렸던 충만의 빛이 되살아오는 것 같았다. 


  이날은 병가로 인해 그의 휴식처에서 지내던 동료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그 고단한 날들을 함께 하지 못한 자책감이 앞섰던지 미안해했다. 동료들은 그의 연약해진 마음에 안쓰러워했고 그런 생각은 건강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와서 팀장님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생각만 해도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의 소박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당신이 일을 했더라면 아마도 나에게는 그만큼의 할 일이 없어져 다른 지역에 파견을 나갔을 것이며, 모르긴 해도 여기에서 일한 만큼의 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격무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이곳으로 복귀한다는 것조차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나의 농담에 밝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면서 머지않아 완전한 몸이 되면 그때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하면서 웃자, 나도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퇴근 무렵 소도시 경계 너머 이웃해 있는 항구도시에 가보기로 했다. 이웃에 있는 항구도시 하진(河津)은 그 포구가 아름다웠다. 그곳으로 저녁 해가 떨어지는 광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 소도시에 머물게 되면서 엘란트라를 몰고 처음 가 본 곳은 그 항구도시였다. 어디에선가 묵묵한 바다냄새가 몰려와서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바다냄새가 나는 쪽으로 가속기를 힘껏 밟았다. 한적한 도로를 달려 나가자 저 멀리에 작은 항구도시가 보였다. 그곳이 바로 하진이었다. 바다물결이 잔잔한 항구는 작고 평화로워 보였다. 작은 항구로 배들이 들고나가는 모습은 한적한 풍경화 한 점을 보는 듯했다. 그곳은 내가 보기에 항구도시라기보다는 오히려 포구를 품에 안은 작은 어촌을 생각하게 했다. 항구 오른편 옆으로 넓은 모래톱이 보였다. 시내에 접어들어선 나는 항구도시가 풍겨주는 냄새를 맡으며 풍경들을 한가롭게 구경하였다. 모래사장이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고,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진 거기에 사람들은 태양 빛과 뒤섞여 휴식을 누리고 있었다. 나는 해변의 모래를 밟으며 뜨거운 태양아래를 거닐어 보았다. 녹색의 물결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는 여름의 태양 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모래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열기가 모래사장을 뒤덮었다. 수영을 하는 사람들은 해파리처럼 늘어져 그저 녹색의 바다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조차 없어 해변은 용광로처럼 달구어져 있는 듯했다. 해변의 열기가 내 온몸을 감쌌다. 나는 녹색의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면 작열하는 태양과 해변의 열기를 어느 정도 피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태양과 열기 때문에 두통이 느껴졌다. 모래톱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나는 항구 쪽으로 걸어갔다. 구리 빛 얼굴로 웃옷을 벗어던진 선원들이 이제 막 도착한 배에서 하역작업을 했다. 그들의 땀으로 얼룩진 갈색 피부 위에서는 뜨거운 태양 빛이 작열하듯 번쩍거렸다. 배의 엔진에서 흘러나온 기름과 그리고 생선, 소금냄새로 절어있는 부두에서 갈매기 떼가 날아다녔다. 항구로부터 출항하는 배에서 긴 뱃고동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뱃고동소리 끝에서 한동안 정적이 멎어 들어왔다. 정적 안으로 번쩍거리는 태양 빛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다시 두통을 느꼈다. 엘란트라로 돌아온 나는 에어컨을 켠 채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휴면을 취했던 것 같다.     


  - 그래, 한 번 가봅시다.  

  항구에는 정박 중인 배들이 무료한 지 어깨들을 기대고 잔잔한 물결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모래톱이 넓게 펼쳐진 해변은 사람의 발길이 끊겨 텅 비었다. 항구 왼편 끝에 선박을 수리해서 바다로 내보내는 조선소에서는 간간이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가롭게 들려왔다. 모래톱이 연결되어 있는 항구 쪽으로는 낡은 목선을 개조해서 닻을 내리고 거기에다 굵은 밧줄을 육지와 연결해 고정시킨 술집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 팀장님, 이제 본부에서 닦달하는 일은 없겠지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나는 동료들에게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말했다. 

  - 아마도 본부에서는 당분간 우리와 연락을 할 일은 없을 겁니다. 

  - 그들은 포만감에 젖어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해야만 할 겁니다. 말 그대로 당분간 일 테지만.

  내가 웃음을 보이자 그들도 소리 내어 웃었다.  

    

  항구 끝에서 이어지는 무인등대에 불이 들어왔다. 등댓불이 깜박거릴 때마다 그곳 어두운 바다 위에는 밝은 기둥이 하나 생겼다가는 사라졌다.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는 단조로운 그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차가운 겨울 밤바다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불을 밝힌 배가 한 척, 무적을 울리면서 항구를 향하여 들어오는 것이었다. 뒤를 이어 서너 척의 배가 무적을 연거푸 울리며 들어왔다. 그 모습은 겨울 밤바다 위로 계절을 잊은 여름날의 개똥벌레 몇 마리가 일정한 대열을 이루고 흘러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불빛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유영하는 개똥벌레들은 항구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항구에 들어와서는 서로 어울리듯 몇 번인가 무적소리를 울렸다. 그 소리는 별들이 반짝이는 겨울밤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이내 정적이 잦아 들어왔다. 항구에 들어와 정박을 마친 배들은 불빛을 껐다. 계절을 잊은 개똥벌레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개똥벌레들이 지나갔던 밤바다 위에는 짙은 고적만이 남겨졌다. 나는 조금 술기운이 올라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바다냄새에 쌓인 항구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는 이 조그만 어촌의 도심으로 들어갈 것을 생각했다. 도심 쪽으로 불을 환히 밝힌 대로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왼편으로 돌아 붉은 주황빛과 하얀빛이 어우러진 네온사인이 일렁거리는 커다란 클럽 하우스를 만났다. 밤을 지배할 듯이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은 <붉은 풍차>라는 글자를 검붉게 드러내 보이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붉은 풍차>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사람들로 붐볐고, 넓은 홀 중앙무대에서는 여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감미로운 샹송 리듬을 따라 조명이 아늑하게 흘러 다녔다. 

  - 팀장님, 이곳에는 러시아에서 온 무희들이 공연을 합니다. 이 새로운 즐거움이 술꾼들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돌려세운다는데요. 

  그네들은 항구도시로 쉽게 들어와서는 체류기간 내내 밤무대 생활을 하다가 대부분이 체류기간을 넘기고서도 불법으로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 이게 묵인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돈이 몰리는 곳이란 원래 불법이 합법으로 횡행하는 것 아닙니까? 

  그는 이 단정적인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늑하게 들려오고 있는 여인의 샹송 위에 쏟아놓고는 테이블 위의 붉은 등을 흔들었다. 웨이터는 그와 무어라고 이야기를 나눈 뒤 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여인의 샹송이 끝나자 손님들의 박수가 몇 차례 이어졌다. 여인의 음색에는 반항과 유혹이 베여 있었다. 여인은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곧바로 무희들이 등장했다. 다섯 명의 무희들은 모두 러시아 여인들이었다. 손님들은 그들의 등장을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를 보냈다. 무희들은 러시아 민속음악에 맞추어 그네들의 스가니아(러시아의 민속춤)를 선 보였다. 

  - 자본의 힘이란 전염병입니다. 저 러시아의 아가씨들이 자본이 떨어뜨려 놓은 돈의 맛을 알고는 집단으로 러시아를 떠나고 있답니다. 노동자의 세상을 추구할 때까지만 해도 순수했을 아가씨들이었는데... 이제 시대가 저들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저 아가씨들 중 상당수가 러시아에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들이랍니다. 그런 그들이 자본의 땅에 들어와서 여섯 달만 일하고 고향에 돌아가면 십 년은 족히 일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 하지 않습니까? 잠시 후면 저들의 매혹적인 몸매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돈으로 사고 있으니까요. 

  러시아의 아가씨들이 그네들의 고유의상을 벗어버리고 몸매를 노출시킨 채 다시 나타났다. 무대 위의 조명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그들의 하얀 몸매가 음악을 타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탄성을 지었다. 우리는 한동안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들의 웃음 띤 얼굴과 율동과 무대 위의 조명 빛 아래서 숨 막히게 녹아들어 가는 하얀 몸매를 바라보았다. 

  웨이터가 와서 동료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말했다. 우리는 조그만 룸으로 안내되었다.    

  

  - 조금 전에 노래를 부르던 여인이 들어올 겁니다. 돌아가기 전에 이곳에서 한 잔 하고 나가야지요. 

  취기가 올라왔고 나는 맥주가 마시고 싶은 갈증을 느꼈다.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여인이 들어오자 무대에서 부른 노래는 정말 좋았습니다, 라고 동료가 말했다. 그러자 여인은 웃었다. 

  - 예, 감사합니다. 

  - 레드, <붉은 풍차>의 스페셜 타임에 부르는 당신의 노래는 이미 우리 고장까지 소문이 왔습니다. 

  그가 다시 이렇게 말을 하자 여인은 장난스럽게 뜻밖이라는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웃었다. 여인은 우리들의 잔을 채웠다. 내가 든 잔에 술이 채워졌다. 


  나는 술잔을 채우고 있는 여인을 보고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여인은 나를 보며 왜 그러시죠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깨를 한편으로 으쓱해 보이며 여인이 따르는 술잔을 받았다. 여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조앙ㆍ마두>의 마담이 떠올랐다. 동생이에요. 그녀의 잠긴 목소리가 생각났다. 모두가 내 책임이지요, 뭐. 내가 이 사업에 정신이 빠져 있지 않았더라면 저 애의 인생이 저리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나는 너무 바빴고 그때 저 애가 온 것이 운이 나빴던 것이지요. 어제 마담은 동생이 정말이지 그곳엘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마담이 말한 항구도시의 그곳이라는 곳이 여기라는 것을 비로소 생각해 냈다. 저 애가 잊어버린다는 것은, 아니 포기한다는 것은 저 애의 나이에 아직은 이른가 봐요. 그리고 저 애는 누구보다도 깊은 갈망을 가진 애니까요. 여인은 밝은 웃음으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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