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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현 Jun 05. 2024

염천(炎天)

수요일의 시


  염천(炎天)


    박성현




    #1


    잠을 자두는 게 좋겠어, 

    내가 말했지 입술을 길게 찢었는데 

    혀 대신 촉수가 튀어나와 

     

    꿈틀거렸다네 숲속에 들어갔을 때 

    검은 성모가 그려진, 

    반쯤 붙에 타고 비에 얼룩진 성화를 들고 

    수녀들이 지나가고 있었지      


          (일렬로 정렬한 

          비슷한 표정, 비슷한 키와 

          냄새, 비슷한 보폭)      


    맨 끝에 뒤처진 수녀에게 물었더니 

    세체니교*를 건너왔다고 말하더군 염천인데도 

    벨벳으로 머리를 싸맨 그녀는 

    선데이서울에 인쇄된

    사해(四海)의 메마른 달빛 같은 목소리였지 

    잠이나 자둬야겠어, 나는 중얼거리면서 

    수녀들을 따라갔지           



    #2     


    우박이라도 내렸어야 했어, 

    달궈진 양철지붕을 올려다보며 말했네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맞췄지만 일정한 톤의 뉴스만 나왔지 50대 중반 남자 아나운서가 전달하는, 오 분 간격의 

    특색 없는 사건들 

    끝없이 반복되는 광고와      


         (여기서는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아, 

         노래가 없다는 듯, 없어야 

         한다는 듯) 

     

    상한 치즈처럼 고약한 냄새들이 

    양철지붕에 매달린 채 

    머리를 짓눌렀지 

    말벌이 지나가면 다시 낮이 시작되고 나방이 날아와 내 눈을 덮었어 우박이 쏟아져야 해, 나는 

    성화를 든 인형들을 뒤섞으며 말했지           



    #3     


    묵시는 

    다른 사람의 눈을 파먹는 자의 

    예감이다 그러나 

    계시, 곧 에포프테이아epopteia**는 자신의 눈을 파먹는 

    자에게 엄습하는 신의 맹렬한 도래다          



    #4     


    나는 

    신의 계시로 열린 숲속을 걸으면서 

    검은 성화를 든 수녀들의      


    긴 행렬을 만나게 된다네 몸을 섞고 피를 마셨으며 뼈를 취했지 열락이 극에 달했을 때 그 옛날 심장을 찢었던 것이 회색 인간이라는 확신이 들게 된 거야 아주 밝은 주황의 데드-마스크를 쓰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으며 파수꾼처럼 덤불에 숨은 채 회색 인간이 쓴 묵시의 기록을 읽어야 했다네      


    머리 위는 무간(無間)의 염천이고 

    그 식지 않는 열기는 아케론***을 도발했지 

    숲의 불면, 

    숲의 고리, 

    숲의 매듭,

    이런 이미지는 낮에서 태양을 분리한다네

    낮과 안개, 낮과 눈썹, 낮과

    라디오를 켜도 참호를 파는 개미 떼 같은 지긋지긋한 날씨 말고는 아무런 얘기도 없었어 

    웃으면서 회색 인간이 말했지 

    ─ 네가 아니면 그럴 리 없다, 고           



    #5     


    염호(鹽湖)를 떠다니며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완전한 나체 완전한 기분 홍가시나무처럼 새빨간 머리카락 어둠을 걷어낸 배꼽을 중심으로 새겨진 태양의 나선형 무늬 

    (숲속의 벨벳 수녀들이 걸어갔던) 

    그들은 공중에 작은 사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새를 가뒀지 새는 방향에서 차단되었고

    방향을 고집하다가 

    방향을 잘라낸 벽에 부딪쳤지

    우박처럼 떨어지는 

    새, 수면을 떠다니며 파닥거리는 완전한 나체의 사람들 홍가시나무를 풀어놓은 듯 고약한 냄새들이 

    양철 지붕에 매달려 있었다네 

    내 사각형에 들어오지 마, 회색 인간이 내게 소리 질렀지 내가 축제를 망친 것처럼 내 알고리즘이 잠을 방해한다는

    의사의 멍청한 진단처럼 회색 인간은 눈꺼풀을 열고 울음을 쏟았지 

    물결치는 지느러미 사이로 나는 얼어붙었지 잠이라도 자둬야겠어 네가 아니면 그럴 리 없겠지만, 

    수다스러운 새들이 회색을 벗기며 말했다네

    한밤에도 양철 지붕은 밝게 타올랐지      





    

       * 부다페스트 서쪽에 위치한 현수교. 1849년 개통)

     ** 명상 혹은 묵상의 경지

   *** 희랍 신화의 저승을 감싸고 흐르는 강




- 월간 <문학사상> 2023년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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