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는 이 역사의 흐름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이 장엄한 역사의 드라마에서 당신이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모든 일이 조금은 견딜 만해질 것이다. 하루하루의 화나는 일에 과잉 반응하지 않게 될 것이다. 최신 트렌드에 지나치게 열광하지도 않을 것이다.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중
작가 로버트 그린은 저서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세대인식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우리의 가치관은 우리가 속한 세대가 역사의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공통적으로 가지게 된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특히 열 살에서 열여덟 살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들을 눈여겨보고 지금의 내가 갖게 된 가치관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이는 자기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이해함으로써, 현시대의 크고 작은 사건들 하나하나에 휩쓸리지 않는 고유한 정신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이런 고유한 정신을 갖기 위해 현재 내가 어느 세대 - 언론에서 얘기하는 베이비부머 세대, 밀레니얼 세대, Z세대 등 세대를 특징짓는 단어에서 찾는다 - 에 속해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세대가 향유했던 문화와 유행을 떠올리는 것을 먼저 시작하면 좋다. 여기선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에피소드를 시대별 주요 사건과 엮어 '나의 역사 연표'를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 출생~유아기(1994년~2000년)
1990년대는 1980년 대 후반 경제 호황 정점의 황금기를 거쳐, 1997년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이다. 출생 직후의 시점이라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겪진 않았지만, 당시 전국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하면서 돌잔치에서 받은 반지를 보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돌잔치를 기념할만한 게 없다며 아쉬워했었다.
유아기에 기억나는 두 가지 일을 꺼내본다. 하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있었던 일이다. 아파트 1층에는 어른들이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혀로 사탕을 입안 여기저기 굴리다 삼켜버렸는데, 목에 걸릴까 겁이나 "엄마.." 하며 근처에 있는 팔을 잡았다. 알고 보니 다른 아주머니였다. "엄마를 찾나 보네"하며 웃으셨는데, 창피함에 얼른 어머니 근처로 숨어들었다.
다른 하나는 처음 어머니와 처음으로 멀리 떨어졌던 날이었다. 유치원에 처음 보낸 날을 떠올리면 천장에서 아래를 지켜보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식당에 갔고, 식판을 가져다주면서 잠시 어디에 가 있을 테니 먹고 있어라고 했다. 그 사이의 기억은 암흑처럼 깜깜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복도에 앉아 크게 엉엉 울었던 내 모습이 그려졌다. 어머니가 우릴 두고 가버렸다고 생각해 서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2. 초등학교 시절(2001년~2006년)
2000년대 초반은 대중문화 황금기로, 이때 넥슨, NC소프트, 넷마블 등 3N으로 대표되는 게임사의 대작 게임이 탄생했다. 또한 출판만화의 인기로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 살아남기 시리즈 등이 가정마다 아이에게 필수로 읽혔다. 일본 문화 수입도 완화되어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이 대거 들어왔고 이 시절에 청소년들은 투니버스 전성기 때 여러 애니들을 보고 자랐다.
나 또한 2000년대 재방영된 천사소녀 네티부터 카드캡터 체리, 달빛천사는 물론 원피스, 나루토, 디지몬 어드벤처 등 장르 상관없이 다양한 애니를 즐겨본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달빛천사 OST는 일반 가수 앨범으로도 손색없을 만큼 완성도 있어서 길거리에서도 자주 불렀다. 지금도 몇몇 가사는 기억나서 따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작은 집이라 매년 명절날이 되면 큰집에서 명절을 보냈는데, 거기엔 컴퓨터가 하나밖에 없어서 친척들과 우리 형제자매들끼리 30분씩 쪼개어 돌아가며 이용했었다. 그때 주로 했던 게임이 크레이지 아케이드, 카트라이더와 같은 아케이드 게임을 주로 했었다. 어릴 적에 게임을 즐겨하던 성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현재는 게임방송을 편집한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게임 스토리를 해석하는 영상들을 즐겨보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크게 싸우고 나서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다. 나중에 언니한테서 어머니가 출산 우울증을 앓았다고 들었다. 원래 나와 동생은 출산 계획이 없었는데 덜컥 낳아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옆집에 잠시 있었던 기억, 할머니 댁에 잠시 맡겼던 기억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그 시기에 잠시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다른 사람에게 육아를 맡겼던 게 아닐까 짐작한다.
어머니와 이혼하신 후 아버지는 일에 더 힘을 쏟았다. 네 명의 자식을 혼자서 키우셨으니 내가 모르는 여러 일들을 동시에 해왔을 것이다. 새벽에 잠깐 들어와 나가시는 일이 일상적이게 되면서 우리는 일찍부터 어머니도 아버지도 부재한 상황에 익숙해졌다. 초등학생 때부터 밥을 짓고, 청소를 하는 등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이 없어,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처음 독립했을 때 문제가 없었던 것도 일찍부터 집안일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지 않을까 싶다.
오빠는 이혼 이후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다. 하루 종일 게임하는데 빠져있었고 학교 숙제나 아버지가 말한 집안일을 전부 나와 동생에게 시켰고, 제대로 하지 않으면 손바닥을 맞았다. 나중에 아버지가 학교 숙제를 동생들에게 시켰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오빠와 우리를 자리에 불러 혼을 냈다. 그때 나는 억지로 시킨 오빠가 아닌 우리에게 화를 낸 것이 억울했었다. 아버지는 가족이 단결돼야 남 부끄럽지 않다고 자주 말씀하셨지만, 자식이 겉으로 멀쩡해 보인다고 속에 든 불만이 없어지진 않는다는 것을 모르셨다.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이성(아버지와 오빠)에 대한 두려움과 실망은 사회에서 이성간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는 대학에 가서도 흔히 말하는 캠퍼스 연애를 하지 않았다. 호감이 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뿐, 연애를 시작하면서 짊어질 책임감 그리고 권태와 이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남들 앞에선 '나 비혼주의자야'라고 말하곤 소개팅 자리를 마련해줘도 괜찮다며 거절했다. 내가 좀 더 자신을 단단하게 지탱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때 누군가를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 중학교 시절(2007년~2009년)
2008년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친 시기다. 당시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는 등 뉴스에서 크게 보도했지만, 경제에 밀접하지 않다 보니 체감하기 어려웠다. 다만 주택을 담보로 잡았던 시민이나 금융상품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와중에, 금융위기의 원인인 월스트리트는 돈잔치를 벌이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접하면서, '공정성'과 '정직성'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영어수업은 다른 영어수업과 달리 수업 전에 팝송을 틀어놓고 따라 부르게 했다. 이때부터 해외 팝 장르에 관심을 가졌고, 지금까지도 해외 팝 위주로 음악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 당시 불렀던 노래 중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lucky', 캘리 클락슨의 'because of you'가 가장 좋았다.
가족에게 안정을 못 받으면서 학교 선생님들께 의존을 했었다. 특히 젊은 여자 선생님을 많이 따랐는데, 아마 유아기 때 어머니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한 관심을 선생님에게서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가족이 아닌 선생과 제자의 관계다 보니 선생님의 관심은 학생의 성적이었고, '성적이 높아야 나를 좋아한다'는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됐다. 그러다 보니 또래 친구와 놀기보다는 점수에 집착하게 됐다.
4. 고등학교 시절(2010년~2012년)
놀토가 폐지되고 5일 출석으로 바뀐 때이다. 우리 때부터 교육정책이 수시로 바뀌어 학부모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우리 다음 학년 정책과 다다음 학년 정책이 다 달랐다. 다행히 시기를 잘 타 언어영역/수리영역/외국어영역으로 시험을 쳤던 수능의 마지막 세대*에 들어와 대입시험에 대한 불안은 적었다.
금융위기 이후 사회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황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130만 부나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나는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독서토론 동아리를 권유하셔서 들어왔는데, 그때 가장 먼저 읽은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나는 '정의'에 대한 탐구보다는 교과서의 내용이 절대적 지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지식이라는 사실이 더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은 이후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전환되었다. 이전엔 교과서에 나온 그대로 암기했다면 교과서에 적힌 지식이 과연 맞는지 의문을 품고 교과서밖에 지식을 탐색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공부를 할 때 관련 서적을 참고하거나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며 내용을 재해석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부터는 수능에 대한 압박이 최고조였다. 이 시기는 내 인생의 굴곡진 부분 중 하나이다. 만점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점수 등락에 따라 감정이 크게 요동쳤다. 모든 시간을 공부에 쏟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친구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아까워했다. 모든지 과하면 지나치기 마련인 법. 집중도는 쉽게 떨어지고 작은 일에도 예민해졌다. 가장 중요한 시기인 여름방학 때 지치고 말아 잠시 애니메이션에 빠지기도 했다.
수능이 자신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학생부 전형이 가능한 대학 위주로 지원했다. 사실 서울 사립대에 입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동생과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엄포를 내렸다. 어쩔 수 없이 동생 성적 커트라인에 맞춰 지방 국립대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것, 쌍둥이가 아닌 독립적인 나로서 살고 싶은 의지가 꺾였다는 게 싫었다. 막상 국립대학에 다니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국가장학금을 받아 학비 부담 없이 다닐 수 있게 되면서 아버지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2014년부터 언어영역은 국어영역으로, 수리영역은 수학영역으로, 외국어영역은 영어영역으로 변경되었다.
5. 대학교 시절(2013년~2016년)
입학 선물로 스마트폰을 받았다. 2007년에 아이폰이 처음 나온 이후 2011년에 한국에 정식으로 판매되면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이용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남들보다 늦게 스마트폰을 접했지만 금세 스마트폰에 익숙해졌는데, 마침 국내 페이스북이 인기가 높아지면서 SNS를 처음 접했다. 페이스북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한번 가입한 적이 있어서 재가입 후 달라진 화면에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기존에는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소식을 나눴지만 스마트폰 출시와 더불어 SNS의 인기로 알면식이 없는 사람과도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대학교 전공을 심리학을 선택한 이유는 고등학교 때 인문학을 접하면서 '스키너의 심리상자'에 나온 심리실험이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취업 목적보다는 학문 자체에 관심이 있어 들어간 케이스이다. 미리 심리학이 어떤 학문인지 알고 들어왔기 때문에 심리학 공부가 재밌었고, 성적도 첫 학기에 과수석을 할 정도로 꽤 우수하게 나왔다. 심리학을 배우면서 성격적 탐색과 자기 치유적인 상담기법을 배울 수 있었고, 처음으로 가장 어두웠던 기억을 직면했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스스로 이해하게 되면서, 예민하고 사람과 거리를 두던 성격이 조금 누그러졌던 것 같다.
가장 흥미로웠던 과목은 학습 심리학이었다. 아무래도 처음 접한 심리실험이 학습심리와 관련되다 보니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조건 형성 원리를 이해하는 것에 관심이 갔다. 나아가 인공지능의 알고리즘과도 연관되는 신경망 원리에 잠깐 발을 담갔을 때는 각각의 조건에 설정한 가중치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작동방식에 매료되었다. 빅데이터 열풍과 맞물려서 데이터 사이언스에 관심을 가졌고, 파이썬과 R 프로그래밍을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열심히 배웠던 기억이 난다.
6. 대학 졸업 이후(2017년~현재)
2010년대 후반에는 국민 차원의 대유행은 없어지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 라이프스타일을 고수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로 실업난을 봐 왔던 90년대 세대들은 회사에 충성보다 워라벨, 자기 계발로 관심을 돌렸다. 취업이 어려워지고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도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이 시기에는 아이를 낳는 것이 부담이었다. 2018년 출생률이 0%로 최저치를 찍으면서 올해를 기점으로 인구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졸업 후 분석을 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심리학과 진로 중에 '리서치 회사 연구원'이 있었고, 이쪽으로 가면 좋겠다 싶어 막 학기에 정부가 지원하는 리서처 양성과정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기말 시험이 끝난 주에 합격 연락이 왔다. OT는 바로 3일 뒤. 나는 정신없이 상자에 짐을 넣고 빠진 게 없나 살핀 후 동생에게 쌓아놓은 상자들을 가리키며 나중에 택배로 보내달라고 말했다. OT 당일, 새벽에 캐리어를 끌고 KTX에 올라탔다.
리서치 양성과정은 4주간 교육과 2주간 현장실습으로 이뤄지며 수료 후 리서치 회사에 면접을 볼 기회를 준다. 나는 외국계 회사를 가고 싶었지만 원어민 수준의 구사력이 아니라서 국내에서 잘 알려진 리서치 회사에 지원했고, 1명을 뽑는 자리에 당당히 합격했다. 면접장에서 '외유내강형'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분을 좋게 봐주신 것 같다. 합격 연락을 받은 그다음 주에 곧바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처음으로 회사에서 제대로 일을 한다는 마음에 설렜다. 그리고 거기서 내 인생 사수를 만났다.
업무강도는 예상보다 빡쎘다. 내가 기대했던 포지션이 아닌 특정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업무가 주어져 살짝 불안했었다. 사수는 이를 알고 있었는지 인수인계 기간을 2주 동안으로 잡아주시고 최대한 세세하게 가르쳐주셨다. 같은 인턴직이었지만 사수는 믿음직했다. 그는 그 만의 색채가 있었는데, 특유의 이질감 때문에 처음에 부서에서 어울리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더더욱 부서에서 인정받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했는데 그 노하우를 내게 아낌없이 말해주었다. 6개월간 인턴생활은 정말 힘들었지만, 그가 가르쳐준 것들 덕분에 부딪혀서 깨져보기도 하고, 상대를 설득해서 일을 추진하는 성과도 얻었다.
인턴생활이 끝난 후 나는 회사일에 지쳤다. 졸업 후 경제적인 자립을 하고 있어서 계속 쉴 수 없었다. 다행히 다음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공기업에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회사에 있는 게 좋아서 항상 일찍 출근해 사무실 주변을 청소하고 대기했다. '어떻게 하면 직원들이 업무를 편히 볼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두고 사용하는 물건들의 위치를 찾기 쉽게 정리하고,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대응했던 사무기기 사용법이나 오류 시 대처방법들을 A4 한 장으로 정리해 근처에 붙여놓았다.
이런 작은 변화들은 조용히 이루어져 남들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직원분들은 말은 안 했지만 계속 내가 해온 작은 일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어느 날 내게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날 부서의 전 직원이 배웅을 해줬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그동안 고생했다고 줬던 음료와 선물들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날 돌아가는 길에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인턴생활은 팀장님과 갈등으로 시작이 좋지 못했다. 불편한 부분을 얘기하면 들어줄 거라는 섣부른 판단에 팀장님의 화를 부른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조직생활에선 상사의 명령을 우선 따르고 그 후에 내가 판단하기에 적합한 방식을 조금씩 요구해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엔 갑갑했던 일도 점차 권한이 주어지고 다른 부서와 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일에 재미를 느꼈다. 특히 서비스에 오류가 생겼을 때 원인을 빨리 파악해 개발팀과 fix 일정을 논의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내가 다녔던 부서는 CS운영팀이었는데, 거기서 고객들의 문의를 받으며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일을 할수록 서비스를 사후 대처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들고 개선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런 일은 서비스기획팀에서 하고 있었고 해당 팀이 일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이 일이 나와맞다고 확신했다.
2019년은 현직자 멘토님 두 분께 큰 영향을 받았던 시기이다. 한 분은 서비스 기획자로서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알려주었고, T자형 인재가 되는 법을 알려주셨다. 다른 한 분은 취업 목적으로만 준비하는 근시안적인 사고가 아닌, 미래 사회에서의 내 위치를 알고, 인생을 받칠 만한 대상을 찾도록 사고의 전환점을 만들어주셨다.
두 멘토님 덕분에 그동안 수동적으로 학습만 해왔던 태도를 버리고 행동하고 결과물을 생산해내는 태도로 변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서 더 이상 취업이 늦어진다는 사실이 초조해지지 않았다. 아직 나는 해보고 싶은 일이 많고 해보지 못한 일들도 많다. 인턴과 아르바이트로 오랜 시간 방황해왔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역사 연표를 들여다보니 내가 일을 대하는 태도와 접근하는 방식은 동일했다. 때론 맞지 않은 조직에 들어가 갖은 고생도 했지만 어떤 조직은 시키지 않아도 나서고 싶을 정도로 나와 꼭 맞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남들처럼 못해 온 게 아니라 남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을 뿐이었다.
공채 중심의 채용방식에서 점차 수시 채용으로 전환되면서 직무 경험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3년 간의 공채 흐름을 봤을 때 앞으로 대기업은 전환형 인턴제와 경력 수시 채용 위주로 변할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나는 이 흐름에 맞춰 좁아진 공채 문만 두들기 보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 나는 사내에 문제 해결사로서 나의 무기를 데이터 분석과 비즈니스적 마인드 두 가지로 잡으려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직접 해보고 결과물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 나는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들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