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며
쓸모에 의해서만 사람을 재단하여서는 안 된다지만, 그 쓸모가 유독 절실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쓸모나 효용이라는 말의 다소간의 매정한 어감과는 무관하게 우리가 그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필요하기에 우린 관계를 시작하거나 유지하고, 이뤄지지 못한 사랑에 슬퍼하며, 그 크기가 없어지거나 현저히 작아졌을 때 이별을 고한다. 사람이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는 그 사람이 내게 간절한 의미다. 간절함과 절실함이 무척이나 심화된 상태가 사랑이다. 필요와 사랑이 서로를 완벽히 대체하는 동의어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서로를 동반한다. 필요하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필요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옆에 있어야 삶이 비로소 이어질 수 있을 것 같고, 그나마라도 즐거움을 느낀다. 사랑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여태껏 무수히나 많았다. 틀리기만 한 오답과 정확하기만 한 정답이 없는 답안지들의 향연이었다. 그럼에도 역시 오답 하나를 자신 있게 던지자면, 사랑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이자 필요가 발생하는 근원적 이유'가 아닐까. 내 삶에로또 1등과 주식 대박과 같은 기적은 아직 없었고 앞으로도 요원할 테다. 하지만 기적이 늘 나를 비껴간 건 아니었다. 내가 필요로 하여 사랑하는 사람도 나를 필요로 하여 사랑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된 기적이라고 하여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린 서로에게 쓸모 있는 사람들이다. 그 소용을 서글프게 증명해대지 않아도 서로의 쓸모가 두 사람 간에 언제나 충분한 인정이 이루어지는 사이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쓸 때 무엇도 증명할 수 없는 나의 가진 것과 지나온 길에 깊은 자괴감을 느낀 적 있었다. 내가 한심했고, 갈 길은 막막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의구심과 회의를 느꼈다. 사랑을 그렇지 않아도 된다. 그게 사랑의 참 다행스럽고도 위대한 점이다. 지금의 연인에게는 나의 쓸모를 다하기 위해 노력할지언정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증명해야 할 책무가 없다. 저를 뽑으면 회사가 성장할 수 있다는 류의 비슷한 헛소리가 아마도 나와 함께 있으면 삶이 더없이 윤택해질 거라는 말이겠지만, 이런 허언에 가까운 공약을 한 번도 내뱉지 않아도 됐다. 존재만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존재만으로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꽤나 낭만적이지만, 낭만이라는 단어가 본래 현실과 어느 정도 괴리가 있기에 달성되기 힘든 구절이기도 하다. 내가 별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그래서 무엇도 이루거나 달성해내지 못하여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다시금 기적이다. 내가 받는 만큼의 사랑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더욱 큰 뭉클함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에게 개의치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어서 큰 안도감을 느낀다.
좋은 사람이다. 보고 있으면 힘이 난다. 힘을 앗아가고 박탈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이 사람은 내게 용기와 힘을 준다. 주려고 주는 게 아니라 역시 이 사람의 존재로 응원이 된다. 그러면서 나 역시도 이 사람에게 등가의 의미이기를 바란다. 살아가며 아플 날이 하루이틀이 아닐 테다. 이 사람의 쓸모는 그 모든 아픔을 치유해 주는 데 있지 않다. <해리 포터> 안 마법사들도 본인의 슬픔과 괴로움을 어찌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한없이 미약한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더더욱 이에 무기력하다. 사랑은 현실의 문제 대부분을 해결할 수는 없다. 서글프게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건, 그게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감정의 교류는 현실 생활의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는 방파제일 뿐이다. 심한 파도는 방파제를 범람한다. 그럼에도 사랑이 위대한 건, 그 두렵고 막막한 순간에 내 손을 잡고 함께 파도를 맞을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점이다. '위대하다'라는 말을 남발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삶의 통증이 가득한 순간에 나의 손을 잡으며 세상을 견뎌보자는 응원 역시 거창하게 보여도 '위대하다' 이외에는 달리 칭할 말이 없다. 나의 무너짐을 막아주어서가 아니라, 내가 무너질 때 그것을 타박하지 않아서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내가 무너질 때 무작정 등을 다독이며 일어서라고 채근하는 게 아니라, 옆에 와서 조용히 웅크린 나의 어깨를 안아주기 때문에 사랑을 삶을 견딜만하게 해 준다.
그런 사람의 생일이 곧이다. 개인적으로 '태어남'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진 않지만, 매 년 돌아오는 생일마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어떤 사람에게든 1년이란 지난 생일부터 올해 생일까지의 시간이다. 연인은 그 시간을, '살아냈다.' 그냥 있기만 해도 돌아오는 날이라고 하기엔, 분명 생에는 그냥 있기조차 힘든 순간들이 가득하다. 우리의 지난 1년은 쉽지만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외침은 때때로 왜곡되어 아픈 언어가 되었고, 그럴까 봐 우린 더 침묵과 가까워졌던 때도 있었다. 사랑을 함에도 '연애'라는 방식에 있어서는 얼마간의 지침이 허용될 수 있음을 필요 이상으로 너무 부정했고 그래서 서로 더 말 못 할 답답함에 끙끙거렸던 기억도 있다. 그럼에도 사랑은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마음은 언제나 양수였다. 우리를 놓아버리지 않았던 결정은 지금 돌이켜 보면 생에 가장 의미 있는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의 1년을 축하하는 게 이번 생일이다. 이번 생일부터 다음 생일까지 역시 많은 일들일 우리를 침범하겠지만, 작년보다는 더욱 의연하고 담대하게 대처하기를 바람이 있다. 성장에 아픔이 따른다는 것만큼 부조리한 진실은 없어 보이지만, 끝내 멀어지지 않은 우린 분명 자랐을 테고 자란 만큼의 편안함이 삶에 깃들기를 소망한다. 조금 더 어른이 된 우리와 우리의 사랑이, 내가 모자라게나마 준비한 몇 안 되는 선물들보다 더 소중한 시간의 부산물이기를 기도한다.
서로가 서로의 쓸모를 충분히 알고, 그걸 사랑이라 즐겁게 부를 수 있는 우리 두 사람이다. 너무 많이 무너지는 생이 우리의 삶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비처럼 무너짐은 찾아올 수밖에 없을 테고 우린 속절없이 비를 맞아야만 한다. 달리 방법은 없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 우산을 씌어줄 사람이 나이기를 바라지만, 우산이 있고 없고를 재지 않고 우선 그 사람에게 먼저 달려가는 성실함을 내가 먼저 갖추는 사람이면 좋겠다. 왜 이렇게 숨을 헐떡이며 우산도 쓰지 않고 왔냐는 그 사람의 물음에, 그래도 둘이서 맞는 비는 조금 덜 추울 것 같다는 말을 천진하고도 따뜻하게 전하며 그나마의 체온으로 안아주고 싶다. 내가 가진 쓸모에서 굳이 따져가며 실제적인 효용을 찾자면 아마도 그 온기일 테다. '비가 오면, 그냥 맞아야겠죠'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보컬이 언젠가 말을 했고 지금도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구절로 남아있다. 거기에 '그래도 둘이라면, 조금은 따뜻할 순 있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비만 오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어둡기만 한 날들뿐인 세상도 없다. 살의 북반구에도 해는 비추고 낮은 있다. 최소한 우리의 삶은 그렇다고 믿는다. 모진 폭우에도 서로를 안아 비를 맞다가,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해가 뜨면 함께 웃으며 서로의 젖은 옷과 머리를 말릴 수 있다는 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 특권이지 않을까. 그 소중한 권리를, 정말 감사하게 오래도록 아껴가며 행사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모진 세상보다 때로는 더 모진 말을 내뱉기도 하는 내게, 커다란 따뜻함과 즐거움으로 나의 생을 안아주어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세상의 무너짐이 요행으로라도 당신을 피해 가지 못하는 순간에, 나도 당신을 꼭 안아줄게요. 나의 쓸모를 당신께 발견하게 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