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한 후에
그리워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축복인지 불행인지에 대해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찬연히 빛나던 시절이 있었음에 감사해야 하나, 아니면 이제 그와 같은 날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에 비관해야 하나. 태생적으로 밝지만은 못한 성격이기에 나는 다시는 꽃피울 수 없는 우리의 지난 계절을 애도하는 편이다. 사랑이 마무리되고, 한땐 사랑으로 가득했던 폐허에서 죽어버리고 버려진 우리 사랑을 혼자 보듬은 적이 있었다. 남겨지는 것 혹은 그 자리에 고여있는 것은 참 많이 아픈 일이었다. 내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은 내 삶에서 가장 절실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이별은 늘 힘들었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파서 그 아픈 가슴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내 손을 놓으면 이 관계가 소멸됨을 예감할 때 나는 비참함과 절망을 같이 느꼈다. 움켜쥔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 사람은 미안해하고, 다른 한 사람은 어떤 이유로 당신이 내게 미안한 사람이 되었는지 아파한다. 더 큰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 더 아파하는 끔찍한 아이러니이기도 했다.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았음에도 난 아직 세상의 원리를 잘 모르겠다. 왜 마음은 항상 같은 크기가 아니라서 누군가는 반드시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도 납득할 수 없다. 그래도 조금 컸다고, 하나 정도는 알게 되었다. 성장의 기저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에 괴로워하고 아파하다가 결국 체념하고 수용하는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걸 한 계단씩 밟으며, 사람은 자란다.
이별은 술을 마시기에 최적의 핑계다. 최소한 대학생 때까지는 그랬다. 어지간한 반대 사유로는 이별 후 음주를 막을 수 없었다. 건강하거나 건전하지는 못한 버릇이지만, 살면서 아직까지 술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이별을 달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나지 못했다. 헤어짐을 핑계 삼아 과음, 때론 폭음까지 해대는 짓을 대학생 때 지랄맞게 많이 했다. 다음날 모든 걸 게워내며 술과 연애는 쳐다도 보지 않아야지,라고 결심했지만 번번이 틀렸다. 남의 돈을 받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그마저도 조금은 어렵다. 누군가의 돈을 받고 일한다는 건 프로라는 소리다. 미칠듯한 숙취를 안고 다음날 일에 집중할 자신이 없다. 프로로서의 윤리의식이라기보다는 따가운 눈총을 피하려는 의도기는 하지만. 이젠 이별을 하고도 담담해야 될 나이가 됐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담담한 척을 해야 한다. 감정이든 퍼포먼스 등 뭐든지에 관하여 기복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프로로서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별 후에도 회사에 나가며 의연한 척을 했다. 밝게 인사하고, 경쾌하게 키보드를 치고, 혼자서 소심하게 짜증을 내보기도 하며 퇴근 시간이 부디 눈 감았다 뜨면 바로 코앞에 와 있기를 기도했다. 남의 돈을 받는 일에는 이 정도 개인사는 개의치 않아야 했다. 그러다 퇴근을 할 때쯤, 모든 공허함이 밀려오면서 넘어지거나 무너질 뻔했던 적도 있었다. 아마 그때의 나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더럽게 없네'라고 내뱉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연애가 끝나면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것이면 다 버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은 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깊이 사랑했던 누군가의 손길과 흔적이 묻어있는 걸 견디기가 참 힘들었다. 내 기억이 그 사람을 떠올릴 여지조차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언젠가 어떤 영화를 통하여 사랑을 고이 간직하여 그 지난 사랑이 마음 안의 온기가 되도록 가꾸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터널 선샤인>이을 것이다. 다시는 읽어보지 않겠지만 편지와 같이 지난 사람의 마음이 깊게 담겨있는 선물일수록 버리기가 어려웠다. 그 편지를 하나 쓰기 위해, 편지지를 고르고 뻐근한 손으로 글씨를 쓰며 편지봉투에 편지를 넣고 틈을 봤다가 내게 건넸을 마음을 생각하면 무엇 하나 고맙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난 사랑을 마음 안에서 어떤 존재로 남기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도 나는 알지 못한다. 전부 버리기도, 그렇다고 모두를 간직하기도 쉽지 않다. 물건도 이런데, 함께 나눈 마음과 기억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더욱 큰 막막함을 느꼈다. 그래도 현재까지 내가 내린 답은, 지난 사랑이 아프다고 무조건 버리고 떼어내는 게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만으로 먹먹하고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과의 기억이라면, 그 기억으로 세상에 사랑이 실존함을 믿고 다음 사랑이 찾아올 때까지 지난날이 꽤 괜찮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지나온 날을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일생에 큰 힘을 준다.
종종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 등의 글귀를 마주하고는 한다. 누군가는 폭음을 할 테고, 누군가는 부러 슬픈 무언가를 찾을 테며, 또 다른 누군가는 사진 등 추억의 조각들을 붙잡고 더 이상 업데이트될 것 없는 추억들을 되짚을 테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누군가와의 이별을 능숙하게 대처하는 법이 사실 어디 있겠는가. 마음이 아프고 또 아플 것이다. 사랑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괴로운 게 헤어짐이다. 슬프고 아픈 일이 생겼으니, 그저 괜찮아질 때까지 울고 추억하며 시간을 보내야지. 물론 생업이라는 현실이 애도 과정을 충실히 밟아나가도록 도와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린 괜찮은 척 혹은 의연한 척을 해야 한다. 그러다 저녁에 모든 감정들이 다시 차올라 아플 수도 있고. 이별은 한 사람을 성장시키지만, 성장한 한 사람이 그토록 절실하게 소원했던 다른 이는 더 이상 삶에 없다. 이 모진 아이러니를 감당하는 것도 이별한 후의 슬픈 행위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린 이별과 이별이 주는 슬픔 앞에 그저 무력한 존재들인걸. 이뤄질 수 없는 그리움에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사랑이 너무 모질게 우리를 찌르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