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
2022년 8월 17일 수요일
작년 늦 봄에 드디어 새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우리 가족은 안도감을 느꼈다. 코로나의 폭풍 속에서 집을 팔고 집을 사고, 무려 2,193 마일(3,529 km)의 장거리 이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큰 축복이었다. 무엇보다 임시 숙소를 옮겨 다니며 체험한 코로나 사태와 떠돌이 라이프는 '집'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러기에 '우리 집'에 이사 온 날에는 가족이 함께 한 곳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특히 엘리와 루피가 이제부터는 이층 발코니에서 일광욕도 즐기고, 포근한 침대 위에서 이전처럼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달력을 보니 어느새 이사 온 지도 일 년이 넘었다. 올해 샌디에이고는 예년에 비해 더운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지구 곳곳이 본격적인 기후변화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요즘 이곳도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 집은 태양광 에너지를 공급받아 사용하고 있다. 스톰과 나의 버킷리스트 중에 '태양광 패널이 설치된 집에서 친환경에너지 사용하기'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새로 장만한 집이 태양광 시스템을 의무화 한 주택 단지여서, 우리는 쉽게 버킷리스트 중 한 가지를 이룰 수 있었다. 특히 캘리포니아 남부는 강우량이 매우 적고, 화창한 날씨가 오래 계속되기 때문에 태양광 발전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캘리포니아 주정부 자료에 의하면 샌디에이고 3인 가구 기준 일 년 평균 전력 사용량은 약 6,000 kWh라고 한다. 그럼 대략 월평균 495 kWh, 일일 평균 16.5 kWh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한국은 4인 가구 기준, 월평균 전력 사용량이 약 350 kWh라고 한다. 우리 집은 올해 5월/41.9 kWh, 6월/64.5 kWh, 7월/81.3 kWh를 사용했다. 6월 말부터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해서, 낮에는 에어컨을 사용했기 때문에 지난 두 달의 전기 사용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하지만 6, 7, 8월을 제외한다면 월평균 45 kWh, 일일 평균은 1.5 kWh 정도 사용한다. 현재 스톰도 나도 재택근무를 하고 있기에, 컴퓨터와 일에 필요한 전자 기기를 장시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가정의 10% 정도의 전기만을 사용한다는 것은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우리 집 전기 소비량이 적은 이유는 모두 미니멀리즘 덕분이다. 간소한 삶에는 많은 가전제품이 필요 없다. 이 집을 살 때 이미 설치되어 있던 가전 중에 전자레인지, 가스오븐레인지, 식기세척기가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요리할 때 사용하는 가스오븐레인지를 제외하고, 전자레인지는 가끔 랄라가 팝콘을 만들어 먹을 때 사용하는 정도이고, 식기세척기는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또한 미국에서는 세탁기와 건조기를 모두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우리는 세탁기만 사용하고 빨래는 햇살에 말린다. 특히 많은 가정에서 한 대 이상 보유하고 있는 텔레비전이 우리 집에는 아예 없다. 랄라가 세 살 무렵이었을 때 가족회의를 통해 내린 결정이었다. 올 가을이면 랄라가 스무 살이 되니, 그렇다면 텔레비전 없이 산 지도 어언 17년째가 되나 보다. 지금까지 여러 생활가전을 처분했지만, 그중 가장 잘 한 선택이 텔레비전과의 이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더 많이 대화하고,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자연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번 주 들어서부터 이곳의 바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시원한 밤공기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 노을 너머 바다로부터 안개구름이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모습을 보니 반갑다. 그와 함께 우리 집 전기 사용량도 무더위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적게 사고, 적게 쓰고, 적게 버리는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처음 미니멀리즘을 시작할 때는 훗날 이 많은 긍정적인 잔물결 효과를 경험하게 되리라고는 예측조차 못했다. 그저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하고, 시각적 소음을 치우는 일에 집중했을 뿐인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미니멀리즘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특별 보너스 꾸러미를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 앞으로도 간소한 삶의 실천을 통해 소중한 인생의 가치를 묵묵히 가꾸어나가고 싶다. 요즘 주위에서 더 많은 벗들이 미니멀리즘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동참할 뜻을 전해 오고 있다. 이 또한 나에게는 몹시 의미 있고 기쁜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