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
2022년 9월 22일 목요일
지금은 아담한 집에 살고 있지만, 여기로 이사 오기 전 살았던 곳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드넓은 정원에 과실수와 푸르른 잔디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집이었다. 그리고 이층에는 '글방'이라고 이름 붙여준 작은 방이 있었다. 글방에는 뒷 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문이 하나 있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갈 때마다 제일 먼저 자연의 변화와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내가 아끼던 몇 점의 명품들과 완전한 이별을 고하게 된 해프닝도 이 글방에서 일어났다.
미국 주택 단지에는 HOA(Homeowner's Association)라는 주택 소유주 협회가 있다. 짧게 설명하자면 이 협회는 회비로 운영되며, 단지 내에서 공유하는 시설(수영장/테니스장/농구장/공영 주차장)과 조경을 관리/보수하는 일을 담당한다. 더불어 정기적으로 협회에서 권장하는 지침에 따라 집주인이 주택의 청결 유지와 정원의 환경 미화에 힘쓰고 있는지도 점검한다. 특히 앞 뜰 같은 경우는 집의 정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과도 같기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하라는 지시가 전달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봄과 가을에는 협회로부터 새로운 잔디를 깔아야 한다든 지, 솔잎으로 나무와 화단 주위를 덮어 달라는 지, 지저분한 물건이 집 앞 쪽에 배치되어 있으니 치워달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문서를 받는다.
우리 집은 건평보다도 앞 뒤로 난 정원이 훨씬 더 넓은 집이었기에, 스톰과 나만의 힘으로 전원주택을 관리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문제는 큰 나무들의 뿌리가 밑으로만 자라지 않고, 잔디를 뚫고 나와 땅 위로 자라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은 곳곳마다 새 잔디를 심어주거나, 더 이상 잔디가 나지 않는 곳은 새롭게 조경을 해서, 잔디밭의 모양을 바꿔줘야 하는 수고도 감수해야 했다. 나의 '굿바이 명품' 결정도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 집에 이사 왔을 때부터 스톰과 내가 꾸준히 다듬으면서 관리해 왔지만, 어느 시점이 되자 새로운 잔디를 깔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우리는 적당한 가격에 손이 덜 가는 잔디를 주문하기로 했다.
새 잔디의 배달을 기다리던 날, 이른 아침부터 집 앞에 어마 무시한 크기의 컨테이너 트럭이 꺼억꺼억 거리며 멈춰 섰다. 굉음 소리에 집 밖을 나가보니 팔레트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아기 잔디판이 산더미처럼 수북했다. 와우! 난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양의 잔디를 본 적이 없다. 과연 오늘 중으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여하튼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의 자세로 일해주신 여러분 덕분에 우리는 하루 만에 작업을 마칠 수 있었고, 나는 뒷 뜰이 새 잔디로 점점 채워지는 모습을 글방 창가에서 구경하곤 했다. 그리고 오후 무렵이 되자 그 넓은 땅이 모두 잔디로 뒤덮였고, 나는 그제야 청구서를 확인하고 몹시 충격을 받았다. 엄청난 양의 잔디를 사고, 배달을 받고, 땅을 고르고, 잔디를 깔고 하는데 든 전체 비용이 작은 명품 핸드백 가격보다도 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환영을 보았다. 글방의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가 싶더니, 드넓은 초원에 잔디들이 춤추고, 그 가운데에 조그마한 명품백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내 두 눈으로 또렷이 보았다. 그래서 다짐했다. '더 이상 내 인생에 명품을 소지하는 일은 없으리라!' 이건 에밀레종으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당장 옷방으로 가서 아직 갖고 있던 명품 시계와 가방과 옷과 장갑을 모조리 꺼내 여행용 트렁크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한국에 나갔을 때 엄마에게 통째로 건넸다.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왜 갑자기 이걸 다 갖고 왔냐고 어리둥절해하셨다. 네가 시집가기 전부터 썼던 거고, 새로 산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며, 그건 사치도 아니니, 그냥 갖고 있으라고, 그래도 살다 보면 가끔은 명품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난 완강했다. 순간 엄마 얼굴이 서서히 나의 눈앞에서 흐려지는가 싶더니, 글방에서 봤던 그 익숙한 잔디밭 풍경이 또다시 펼쳐졌다. 난 다시 한번 맘속으로 되뇌었다. "굿바이 명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