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
2022년 10월 17일 월요일
지난주 금요일 대형 트럭이 우리 동네 앞 도로의 소화전을 들이받는 사고가 있었다. 곧바로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에서 봤던 분수쇼를 능가할 만큼의 물이 끊임없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처음에는 수도공사에서 담당자를 사고 장소로 보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분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돌아갔고, 바로 소방차 두 대가 출동했다. 소화전의 윗부분 전체가 물기둥과 함께 솟아올라 없어졌기 때문에, 폭포수 같은 물을 맞아가며 땅에 설치된 수동 스위치를 끄기 위해서는 소방대원의 특수 장비와 팀워크가 필요했다. 그렇게 모두가 힘을 모아 소화전을 완전히 잠그는데 무려 40분이나 걸렸다. 나는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소방관이 불을 '끈다'는 표현이 물에도 사용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불도 무섭지만, 엄청난 수압의 거대한 물기둥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장면도 무서웠다.
뜬금없이 계획에도 없던 '디지털 청소'를 하게 된 건 바로 이 사고 때문이었다.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구쳐 오르는 물을 보면서, 나는 내 전자 기기에 쌓여있는 디지털 자료들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갑자기 평온한 일상을 망가뜨려 놓는 일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컴퓨터에 저장된 전자책, 문서, 자료, 즐겨찾기 등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루면 충분할 거라고 달려든 일이었으나, 클릭하면 클릭할수록 더 많은 양의 자료가 뿜어져 나왔고, 결국 주말 내내 디지털 청소를 하면서 보내야 했다. 그래도 이렇게 말끔해진 컴퓨터 앞에 앉으니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가뿐하다. 역시 정리 정돈과 청소는 시작하면 마칠 때까지 힘은 들어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만족감은 결코 우리의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
'디지털 청소'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몇 년 전부터 실천하고 있는 '디지털 디톡스'도 소개하고 싶어 졌다. 나는 여름/겨울 안거(安居) 3개월씩 총 6개월은 의도적으로 사회 관계망 서비스에 게시물을 올리지 않는다. 대신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와 워라벨(Work-Life-Balance)을 검토하고 그동안 쌓인 채팅창과 메모장을 정리하며 보낸다. 그리고 문자나 이메일도 이 기간에는 한번 더 생각한 후에 보내는 연습을 한다. 예를 들면 아주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을 때, 속상한 일이 있었을 때, 누군가 그리울 때,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하기보다, 조금 더 그 마음을 내 안에 담아 두었다가 적절한 때가 오면 하거나, 돌이켜 생각해 봐서 꼭 필요한 문자가 아니면 보내지 않는다. 이런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 내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양의 불필요한 정보를 함부로 나누며 살아왔는지 반성하게 된다.
미니멀리즘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디지털 청소'와 '디지털 디톡스'라는 정기 행사가 저절로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을 가능성은 몹시 낮다. 눈에 보이는 물건을 줄여가게 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한번 더 살펴보고 분류해서 정리하는 새로운 습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미니멀리즘의 실천은 에너지 절약과 장보기 그리고 은행 예금/신용 카드 관리에까지 영향력을 넓혀갔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경험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여하튼 내가 디지털 청소에 흠뻑 빠져 주말을 보내는 동안, 한국에서는 카카오 데이터 센터에 화재가 발생하여 나라 전체가 서비스 장애를 겪는 '인터넷 대란'이 있었다는 뉴스를 뒤늦게 접했다. 그나마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사고는 예고 없이 발생한다. 물도 불도 데이터도 인생도 안전 점검과 꾸준한 관리는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주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