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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쉬어가도 괜찮아

by Rainsonata

2022년 9월 27일 화요일


출판된 책의 인기나 작품성과는 별개로 글에서 느껴지는 고유한 인간미 때문에 마음이 끌리는 작가가 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대문호 Lev Nikolayevich Tolstoy (1828 - 1910)도 그중에 한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등의 명작도 물론 훌륭하지만, 그의 인생에 대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짧은 글은 소박하고 따뜻하며 진솔하다. '삶이 불만족스럽게 여겨질 때는 달팽이처럼 자신만의 공간으로 물러나 쉬도록 하라'는 톨스토이의 조언을 읽으며, 나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덤블도어 교수님처럼 길고 흰 수염을 늘어뜨린 톨스토이와 모닥불 앞에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와 함께 타닥타닥 마른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다 보면, 나는 달팽이 패각이 주는 아늑함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또 다른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주위를 둘러보면 진취적이고, 능동적이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삶을 직/간접적으로 종용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딛고' '자신의 한계와 싸우며' 등의 표현은 스토리텔링에서 '극복' '승리' '성공'에 방점을 찍는 바람잡이 역할을 한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달팽이 조언'에는 반드시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 닥친 어려움을 헤쳐나가라는 압박이 없다. 삶의 힘든 순간에 '자기만의 방'에서 혼자 조용히 머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렇게 얼마 지내다 보면 조금 더 맑은 시야가 내 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이 의도적인 기다림 속에서 상황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거나, 어떤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게 된 경우가 있다. 그 이후부터는 기꺼이 달팽이가 되어 등껍질 속으로 물러나는 행위를 잘 활용해가며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달팽이>


도종환


새순이 푸른 이파리까지 가기 위해

하루에 몇 리를 가는지 보라

사과나무 꽃봉오리가 사과꽃으로

몸 바꾸기 위해 하루에

얼만큼씩 몸을 움직이는지 보라

속도가 속도의 논리로만 달려가는 세상에

꽃의 속도로 걸어가는 이 있다.

온몸의 혀로 대지를 천천히 핥으며

촉수를 뻗어 꽉 찬 허공 만지며

햇빛과 구름 모두 몸에 안고 가는 이

우리도 그처럼 카르마의 집 한 채 지고

아침마다 문을 나선다.

등짐 때문에 하루가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짐에 기대 잠시 쉬기도 하고

이 짐 아니었으면 얼마나 허전할까 생각하면서

우리도 겨우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아름다움도 기쁨도 벗어 버릴 수 없는

등짐의 무게 그 깊은 속에 있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며

오늘도 달팽이는 평온한 속도로

제 생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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