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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Feb 25. 2023

할머니 93세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할머니,


소중한 할머니의 아흔세 번째 생신을 맞아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게요. 


저희 집에서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아담한 크기의 호수가 하나 있어요. 새 집으로 이사를 준비할 때부터 경치가 아름다워서 눈길이 가던 곳이에요. 그래서 이사를 오자마자 호수 주변을 둘러보러 갔더니 높은 철조망이 세워져 있고 출입금지 표지판이 입구에 붙어 있었어요. 잠시 머무르며 근처의 지형을 찬찬히 훑어보니 호수를 에워싸듯 조성된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어요. 하지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여전히 호수로 향하는 입구는 굳게 닫혀있을 뿐 아무런 변화가 없었어요. 다행히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언덕이 있어서 저희는 그곳에 앉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머물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죠. 그러면서 점점 호수와 정이 들었고, 도대체 이곳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직접 자료를 찾아보게 됐어요.


할머니, 그럼 제가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알려드릴게요. 이 호수는 1959년에 만들어진 식수 전용 저수지로 1984년까지 사용되다가 캘리포니아 식수 관리법이 강화되면서 소방용 저수지로 남았대요. 큰 산불이 났을 때 소방 헬리콥터가 호수에서 물을 채워 갔다는 기사도 있었어요. 가끔 동네 사람들이 몰래 낚시를 하러 오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출입금지 구역이었기 때문에 자연이 그대로 잘 보존될 수 있었대요. 실제로 황소개구리, 거북이, 노새사슴, 너구리, 코요테, 살쾡이가 지금도 호숫가에 살고 있으며, 이 지역의 생태학자들 사이에서는 조류 서식지로도 제법 잘 알려진 곳이라고 해요.


저는 사람과 사람사이뿐만 아니라 자연과 자연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끌림 존재한다는 것을 호수와의 인연을 통해 배웠어요. 그리고 자료를 살펴보면서 흥미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신도시 계획이 한창이던 2005년 도시개발부가 40억 원의 예산을 들여 대규모 시민 휴양 공원을 조성하는 계획안을 제출했는데, 7년간 결정이 표류되면서 호수가 그대로 방치되었대요. 그 후 2012년에 공식적으로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서 자연보호를 이유로 공원 건설 계획을 철회하면서 대망의 호수 개발 프로젝트는 백지화가 되었다고 해요. 그 당시 문서를 보니 공원 부대시설 목록에 산책로, 카약/카누 대여소, 관리인 숙소, 주차대수 100대 이상의 부설 주차장, 화장실과 매점등이 적혀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뒷 산의 오솔길과 호수를 둘러싼 산책로를 통과해서 아랫동네의 또 다른 호수에 이르는 둘레길 공사도 계획안의 일부였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우여곡절의 시간을 보낸 후, 도시개발부는 이곳에 친환경 산책로를 조성해 일반인에게 개방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대요. 그때부터 공사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곧 완공을 앞두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코로나가 창궐해서 또다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거죠. 그래서 안전상 호수 주변에 높은 철조망을 세워 출입을 통제하게 되었고, 바로 그 무렵에 저희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는 것이 제가 지금까지 알아낸 호수 이야기의 전말이에요. 지금 할머니가 제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계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어머나 얼마나 다행이냐. 이 예쁜 곳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고 놔둬서 두고두고 볼 수 있으니, 정말 잘 된 일이다. 할미는 너희가 여기로 이사 와서 행복하게 지내는 것도 너무 감사하고,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는 걸 보니 이만한 복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럼 이제 진짜 기쁜 소식을 말씀드릴게요. 할머니!!!! 얼마 전 호숫가에서 새로운 변화를 포착했어요. 비가 많이 온 다음 날, 호수에 물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려고 언덕에 갔다가 호수 부근에 세워졌던 철조망 사이로 사람 두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생긴 걸 발견했어요. 너무 신이 나서 아래로 내려가 봤더니 입구에 새로 만든 나지막한 나무 계단까지 놓여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미 시멘트로 호수의 진입로를 평평하게 다져 놓았더라고요. 이 년 넘게 언덕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우리가 저 멋진 산책로를 걸을 날이 올 거야!"라고 다짐했는데, 드디어 그 말이 현실이 되는 날이 온 거예요!!!!!


며칠 전 호수의 산책로를 유유히 걸으며 할머니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할머니를 모시고 올 수 없어서 애석했어요. 그런데 신비하게도 할머니와 이미 함께 걷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어서 평온했어요. 지금 호수 주변에는 각종 야생화와 세이지 덤불들이 피어나면서 봄의 시작을 알리고 있어요. 그래서 할머니와 함께 산책로를 걷는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꽃을 아끼시는 할머니께서 작고 가녀린 풀꽃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실 테니까요. 그러면 저는 걸음 수보다 멈추는 수가 더 많다며 할머니께 투정을 부리거나, 드넓은 호숫가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거나, 꽃구경하시는 할머니를 기다리면서 한 숨 푹 자고 일어날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들어서 할머니를 꿈에서 뵙는 수가 다시 늘어났어요. 그러다 보니 아침에 바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대신 포근한 이불 안에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와 할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가만히 누워있는 날들이 많아졌어요. 예전에는 할머니의 심오한 교훈이 담긴 꿈의 꿈같은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할머니와 제가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꿈을 더 많이 꿔요. 평상복 차림의 할머니와 밥을 먹거나, 그냥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하루의 일과가 스치듯 지나가면서 영화처럼 상영될 때도 있어요. 의미심장한 꿈이건 할머니와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꿈이건 저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요. 우리 할머니께서 꿈으로 저를 찾아오셨는데 뭘 더 바라겠어요? 


저는 이미 할머니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고, 지금까지 잘 지니고 있고, 앞으로도 소중히 간직할 걸 알기 때문에 더 부릴 욕심이 없어요.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가르침대로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며 살아갈게요. 매 년 봄이 찾아오면 마음이 셀레면서도 슬퍼지는 이유가 할머니와 꽃들이 저에게 손짓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 눈길 닿는 곳마다 할머니의 온화한 미소와 인자한 음성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어요. 고운 얼굴만큼 아름다운 인품을 지닌 우리 할머니의 아흔세 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에 감사드려요. 할머니 사랑해요! 많이 많이 보고 싶어요!


2023년 2월 24일 (음력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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