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처음을 시작하기에 가장 적당한 말은 어떤 걸까? 항상 그걸 고민해. 고민하느라 단 한 줄도 쓰지 못할 때도 있어. 어쩌면 적당함이란 없고, 무엇이든 쓴다면 그게 처음이 되는 건지도 모르지만. 비가 온다. 빗방울들이 강렬하게 아래로, 더 아래로 떨어져 아스팔트 바닥에 으깨진다. 부서지는 빗물. 가로등 불빛이 어른거리는 한밤중의 아파트 벽면과 그곳에서 몸부림치는 나무 그림자의 슬픔. 처절한 반항과 죽음을 향한 구애의 몸짓. 나무는 비를 사랑했을까? 말리듯 뒤흔드는 바람의 손길을 뿌리치며 비의 투신을 몸으로 받아낸다. 비가 그칠 때쯤, 잠잠해지며 체념한 듯 습기의 무게에 고개를 떨구는 나뭇가지.
그런 날에는 아프다. 물을 따뜻하게 덥히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몸을 씻는 것이 아프다. 창밖으로 수많은 빗방울이 터져나가는 동안, 마찬가지로 수직 낙하하는 물줄기로 나를 깨끗이 하는 일이 아프다. 도시 한가운데서 욕조는 풀을 뜯는다. 희미한 가스 냄새가 난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노을이 콸콸 쏟아지고 욕조는 긴 울음소리를 낸다. 나는 하늘에 앉아 구름이 품은 수증기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인다. 요즘 나는 자주 울어. 네 세계는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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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문다. 어떤 기준이나 순서 없이 뒤죽박죽 섞인 기억이 하나씩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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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에게 처음으로 ‘모른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사람들은 날 알았다. 독특한 문양과 발목까지 오는 긴치마를 좋아한다는 것, 종종 일부러 시험지를 백지로 낸다는 것,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나가지 않는다는 것, 저녁을 먹은 후에는 계단에 거꾸로 매달려 하늘을 본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게 이상해 보인다는 것도. 그들은 말했다. 널 아니까 하는 말이라고.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효율적인 쪽을 선택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너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단지 빤히 쳐다보다가 한마디 했을 뿐이다. 사실 이유는 없지?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 거잖아. 응. 그럼 그렇게 해. 불편하지 않은 정적이 흐르고, 나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너 나 알아? 너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 몰라.
네가 운동장 트랙을 맨발로 천천히 걷는다는 것, 운동화보다 슬리퍼를 좋아한다는 것, 면접에서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는 이유로 건방지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 가끔 바람 빠진 풍선이나 찢어진 종잇조각을 주워 보관한다는 것을 안다. 당연하게도 난 여전히 너를 모른다. 네가 너일 가능성을 막지 않는다. 너는 말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흘끔흘끔 시선을 보냈지만,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한다고. 너는 너니까, 그러려니 한다고. 누군가 자신을 싫어한다면 장난기가 생겨서 일부러 잘해주는데, 질색하는 얼굴을 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고. 자기가 보기엔 남들도 이상하다고 했다. 나는 웃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여전히 이상하고, 너도 여전히 이상하고,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이상하다. 그건 꽤 이상하고, 즐거운 일이다.
하나의 획일적인 시선으로 그리는 딱딱한 초상화가 아닌, 생명력이 담긴 눈빛과 얼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엘로이즈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마리안느에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온갖 책의 28페이지를 펼치고, 그곳에서 너의 얼굴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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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호밀밭의 파수꾼>, 나는 <달과 6펜스>를 들고 하수구 냄새 진득한 다리 아래를 걷는다. 검은 물은 잔잔하거나 소용돌이치고, 나머지 손에 든 데자와 캔을 구기며 맥락을 만드는 작업. 혀끝에 맺힌 언어는 입술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너와 나의 대화는 온갖 상징을 진열한 가판대. 부자일수록 비밀이 많다더라. 나는 부자가 될 거야. 아주아주 부자가 될 거야.
나는 너에게 <달과 6펜스>를 건네고, 너는 나에게 고장 난 시계를 건넨다. 여행 갔을 때 샀어. 그때는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숙소에 가니까 멈춰 있더라. 시계를 꼭 쥐고 뚜껑을 열었다 닫아본다. 이게 더 좋아. 시계를 샀던 시간에 고정된 거니까. 시간 여행을 하고 싶을 때면 너도 모르게 다녀올게.
너는 <달과 6펜스>의 첫 장을 펼친다. 스트릭랜드의 이름이 채 나오기도 전, 비어있는 책장에 볼펜으로 적은 글씨. 에스 모스 쟈인, 졸업 축하해 친구. 너는 묻는다. 왜 달과 6펜스야? 나한테는 이미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는데. 에스 모스 쟈인, 이건 너무 아이러니야. 너와 나는 자주 걷는다. 자주 걸어서 너의 걸음걸이를 외웠다. 보폭은 크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음미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는 지폐와 책이 든 베갯잇을 든다. 네가 입을 연다. 이 이야기 누가 쓸까? 네가 써 언젠가 유명해지면. 그때 가서 모른 척하지 말고. 연락해.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사람도 어쩔 수 없다고.
언젠가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알파고는 맞춤법을 아는데, 맞춤법은 알파고를 알까? 알겠지. 혼자만 아는 건 조금 슬프잖아. 블랑쇼가 그러더라. 내가 문장을 보면 문장도 나를 본다. 그래서 글을 쓴다. 문장과 눈 맞춤을 하려고. 너는 문장을 본다. 문장도 가끔은 너를 본다. 간절할 때는 보아 주기도 한다.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 간절해질 때는 언제일까. 죽고 싶고, 죽고 싶기만 한 게 아니라 정말 죽으려 할 때. 그때는 문장도 고개를 돌려 너를 보았다. 아주 가끔은.
가끔이 찾아온다는 건 슬픈 일이지.
너는 말했다. 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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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고양이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가와 앉는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지만 부르지 않는다.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 거기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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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빗소리는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비슷하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먼지를 묻히고 들어와 계속해서 돌아가고, 돌아가고, 또 돌아가는 세탁기 통 속의 빨래들. 흰 옷을 물들이는 색깔 옷, 줄어들거나 늘어난 니트들, 속옷과 함께 붙어 물속을 헤엄치는 양말. 우리는 구분하지 않고 한 번에 넣어버린 빨래처럼 장마 속을 헤엄치며 서로에게 뒤엉킨다.
마지막 말은 고민하지 않는다. 안녕, 그리고 다시 안녕.
*장 뤽 고다르, <VIVRE SA 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