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는 걸음이라도

by 이비


실수로 볼펜 촉을 집어넣지 않은 채 머리를 콕 찍었다. 머리카락 사이 감춰진 두피 어딘가에 안착한 점. 감각을 뾰족하게 세우면 위치를 찾을 수 있지만, 점점 희미해진다. 두피 위의 점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점은 내 뇌의 어느 부분과 맞닿아 있을까. 어떤 생각 위에 실수처럼 검게 번졌을까. 무기력은 잉크를 따라 피부 표면에서부터 머릿속으로 침투한다.


산다는 건 과수면과 불면의 연속이다. 깨어나는 방법을 잊은 것처럼 꿈을 꾸거나, 꿈꾸는 법을 잊은 것처럼 빳빳한 눈을 비비는. 며칠을 내리 잘 때면 온종일 이불속에서 따뜻한 세계를 경험한다. 일상과 이상, 세상은 경계 없이 존재하고,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물구나무를 선 채 걷는다. 가끔은 눈을 뜬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무거운 이불과 그보다 더 무거운 눈을 떨어뜨린다. 며칠을 내리 지새울 때면 두 눈을 부릅뜬 채 허공을 노려본다.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지만 찾아오는 건 베개 밑에 눌러 둔 생각들. 지겨운 눈싸움에서는 지는 법이 없다. 감기지 않는 눈과 함께 펜을 들어 올린다. 어지럽게 증식하는 단어를 붙잡아 종이 위에 매어놓는다. 적당함이란 건 아직 읽지 않은 사전 속에 기록되어 있으며, 나는 자주 꿈과 현실 사이의 가느다란 줄 밖으로 떨어지곤 했다.


내 삶은 항상 어느 극단에 몰두해 있다. 절망, 혹은 희망. 절망도 희망도 허망한 것은 마찬가지라는데, 모든 것을 내던진 절망이 진정한 절망이 아니라면 모든 것을 내던진 희망이 진정한 희망이 아니라면 나는 허망함에 몰두한 건지도 모른다. 연약권 위에서 떠다니는 판들은 점점 멀어진다. 그 간극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무기력이 말한다. “둘 모두를 붙잡는다면 언젠간 몸이 찢어지겠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려면 표현의 도구가 필요하지만, 네가 가진 것은 너밖에 없고 언어는 늘 그렇듯 굴절하며 왜곡된다. 너는 말할 수 없다. 너는 걸을 수 없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무기력은 손쉽게 의지의 근육을 앗아간다.


규칙 없이 떠오르는 상념 속을 헤맨다. 나도 할 수 있을까. 조금쯤은 변할 수 있을까. 침대가 내 세계의 전부였던 시간. 앉아서 책을 펴고 사랑에 대해 읽는 공간. 타오르는 불과 사막의 신기루는 싸늘한 재가 되어 흩어지고, 나는 재로 뒤덮인 도시 속 보름달을 잡고 일어난다. 비틀거리는 걸음이라도 걷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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