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계절
울 아부지 여든셋
아무 의욕 없던 아부지가
하고 싶은 게 없어진 아부지가
구절초 보러 가자 하신다.
젊은 아부지는
늘 계절을 맞이하러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 가을이면 아부지는
쑥부쟁이며 구절초를 안겨주셨다.
구절초가 어디 만발했을까
투명한 가을 아래 그 구절초를
나는 이 밤,
애타게 찾는다.
인생은 돌고돌아
이젠 내 차례
아부지가 펼쳐주신 그 가을을
내가 안겨드릴 시간
내일 아침,
울 아부지 변덕이 나기 전에
이 가을 다 가기 전에
이름도 낭만인 춘천春川
인생이 낭만인 아부지랑
그곳에서 찾아야겠다.
부녀의 가을,
만발한 구절초로 피어나도록.
우리 아부지는 정말로 낭만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험을 망친 딸에게 가을 국화꽃 한 다발을 안겨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것도 보통 시험이었을까요? 수능이었지요!
낭만을 즐기시는 우리 아부지가 경미한 뇌졸중을 겪으신 후 부쩍 늙은 모습입니다. 아부지랑 저랑은 계절맞이 드라이브 파트너. 그러나 의욕을 모두 잃은 파트너이지요.
갑자기 구절초 보러 가자는 아부지가 너무 반가워 그 밤에 끄적인 글입니다. 아부지는 저에게 세상을 느끼는 눈과 마음을 주셨어요. 인생이 돌고 돌아 이제 제 차롄데요. 아부지가 저에게 해주셨듯 저는 아부지에게 그리 못해드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픈 요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