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잔소리 속에 스며있는 온기
나는 사람의 말투에서 묘하게 묻어나는 ‘온기’를 좋아한다. 욕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글을 쓸 정도로.
우리 엄마의 투박한 사투리에는 따뜻함과 유머가 숨겨져 있다.
슬쩍 눈흘기며 '가시나 지랄한다'라고 말하곤 했던 나의 엄마. 나는 그 말이 너무 정다워서 욕이 아닌 줄 알고 살았더랬다. 내 나이 열 여덟에 오죽하면 친구하고 내기를 했을까. '지랄'은 욕이 아니라고. 물론 나는 내기에 졌지만 말이다.
수도권에 산지 50년 가까이 된 우리 엄마, 이제 그 찐한 경상북도 사투리도 조금은 누그러질만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고향에 머무르는 우리 엄마의 사투리와 정서. 그러나 나는 그 날것의 언어를 너무나 사랑한다.
아부지의 하루를 걱정하며 매일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하던 대로 아빠의 안부를 물었던 어느 날이다. 아빠는 오늘 어때? 느그 아부지, 하루종일 살곰살곰 강새이처럼 들왔다 나갔다 안하나!
엄마는 아부지를 '강새이'라고 말하였다.
새벽에 눈뜨자마자
엄마 몰래 동네 마실
담배 한 모금으로 아침을 열고
각자의 일로 분주한 저녁
엄마 몰래 냉장고 탐험
막걸리 한 모금으로 저녁을 마무리
시골집 강새이처럼
하루종일 바쁜 아부지
by 봄비
엄마가 말하는 강새이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아침이면 슬금슬금 어디론가 마실을 간다. 동네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 어디서 뒹굴다 왔는지, 그래도 저녁이면 또 집이라고 찾아들어오는 강새이. 예나 지금이나 강아지 별로 안 좋아하던 엄마의 마음을 그 강새이도 아는지 슬금슬금 엄마를 피해 다니곤 했다고. 그런데 우리 아부지를 엄마가 강새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든 넘어 뇌졸중 초기 진단을 받았음에도 술이며 담배며 전혀 건강을 걱정하지 않는 우리 아부지, 나야 딸이니 아부지를 걱정하지만 엄마는 남편이니 미울 수 밖에. 2년 전 가을, 그날도 강새이처럼 새벽부터 동네마실을 나가신 우리 아부지. 그날 이후, 아부지 몸은 예전과 같진 않으셨다. 큰 탈 없이 스쳐지나간 병이었지만 그 후로 우리 가족은 건강을 돌보지 않는 우리 아부지때문에 나날이 전쟁을 치르곤 했다.
그러니 엄마의 잔소리는 쉴 날이 없다.
양말 좀 신고 나가소!
아침에 미지근한 물 한잔 마셔야지 와 맨날 얼음 든 커피를 마시능교!
내가 좀 바쁘면 느그 아부지, 슬금슬금 내 몰래 막걸리 찾으러 나온다 아이가!
아부지한테 잔소리하는 엄마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엄마, 어차피 아빠는 고칠 생각이 전혀 없어. 엄마의 걱정은 아부지한테 그냥 잔소리로 들릴 뿐이야. 오히려 더 엄마 몰래 그러구 다닐지도 몰라. 엄마 눈 피해 슬금슬금 피해다니던 어릴 적 엄마네 그 강새이처럼.
엄마는 내 마음을 너무 잘 안다. 툭 내뱉은 말 하나를 아부지 안계신 어느 날 후회할까봐 겁내하는 나의 마음을. 걱정으로 내뱉은 말로 후회할까봐 두려워하는 나의 마음. 엄마는 나의 걱정을 온전히 마음으로 느껴주신다.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남편에게 약오르는 마음은 숨길 수 없다. 부녀간의 정 말고 부부간의 관계로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니, 느그 남편이라도 그래 이해할 수 있나?
내 남편이면 깨자반을 만들어놨지!
나는 숨도 안쉬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나의 감정실린 대답에 엄마는 웃음을 터뜨린다. 답답한 마음을 딸이라도 알아주니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엄마의 숨통이 트여온다. 그 순간 엄마와 나는 한 배를 탔다. 내 편을 얻은 엄마는 마음을 다잡는다. 남편으로 바라보며 기대하지 않기로, 애타는 딸의 마음을 들어주기로.
그렇게 엄마는 딸의 은근한 부탁에 마음을 내려놓는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들은 대체로 아이에게 재미있는 일들이다. 오락실에 가지말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또 머릿속에 맴맴거리는 오락실에 가고 싶은 법. 이 썩는다고, 배아프다고 찬거 먹지 말래도 아이들은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또 녹아나는 법.
아이들이 그렇듯 아부지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싶어한다. 아부지는 엄마 몰래 지갑을 찾고, 엄마는 그 지갑을 곳곳에 숨겨놓는다. 지갑 하나 두고 숨바꼭질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신혼부부 같기도 하다. 결국 아부지는 숨바꼭질에 이겨서 혈관이 얼어붙든 말든 하고 싶은건 하고 돌아오는 아이가 된다. 엄마는 혼잣말을 한다. 느그 아부지 언제 철드노.
엄마, 철든 모습은 아빠가 아닐지도 몰라.
철들면 이제 안녕일지로 모르니
그냥 철딱서니 강새이처럼 행복하게 살면 되는거지 뭐.
엄마의 '강새이'란 말에는 늙어가는 남편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 애틋함이 함께 묻어있었다. 엄마는 우리 아부지를 어쩌면 남편이 아닌, 돌봐주어야할 애처로운 강새이처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살금살금도 아니고 살곰살곰이라니. 엄마 몰래 일을 꾸미는 아부지 모습에 미운정이든 고운정이든 정을 담뿍 담은 표현이 아닌가.
엄마 말대로,
살곰살곰 엄마 몰래 마실다니는 강새이처럼
아빠가 그렇게 행복다면 그 뿐이지 뭐.
일상이 깨어지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이 그저 다행인거지 뭐.
살곰살곰 강새이처럼 다니는 남편을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
그 마음이 묻어난 엄마의 말에는 온기가 흐른다.
때로는 지칠만한 삶의 장면도 사람냄새 가득한 유머로 이어내는 나의 엄마를 사랑할밖에.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