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작고 활기찬 몸으로 산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육중하고 둔한 내 몸으로 사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치지 않는다. 지치지 않기에 쉼은 그저 지루하다. 아비와 어미에게 쉼이 필요한 순간, 마침 소년의 열정을 받아주는 이들이 있어 다행이다. 전주의 공장을 개조하여 만든 문화기지 팔복예술공장. 전주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위한 일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황량한 폐허미가 돋보이는 노출 콘크리트의 공장 부지와 어울리는 빛깔의 황토가 깔린 놀이터. 녹색 기운 없는 대지 위에 물기 없이 흩날리는 흙먼지 위로 태양만 작렬한다. 잎보다 빠른 봄꽃이 송이째 나부껴 애비는 마음이 어지러운데, 그 사이를 날다람쥐 한 마리가 가로지른다. 놀이터에 자리 잡은 개미굴 속으로 사라진 아해는 아비에게 어디로 나올지 맞추어 보란다. 정말 맞추면 삐질 거면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태양을 피해 전시관으로 입장해 본다. 주말 연소자들이 채운 이 공간을 평일에 점유하고 있을 예술가들의 기획 전시. 사회적 규범 안에서 프로그래밍 되는 인간의 정체성을 보려 한다는 작가. 혈기 없는 어른들의 손에 양육되는 아기들의 육체들이 버둥댄다. 이 작가는 젊을 텐데 육아를 벌써 아는 것인가. 저 쉼을 모르는 육체들의 활기를 어떻게든 누르고 통제하려는 피곤한 부모의 마음 안에 깃든 자포자기 심정은 보지 못한 듯도 싶다. 짓뭉개진 아이들의 얼굴이 유난히 슬프지만, 쉴 새 없이 놀아달라 조르는 자식의 활기를 이기기 역부족인 부모로서는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 글읽기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워 온다. 육아의 고단함에 관하여 써보라는 아내의 권유가 무섭다. 과거의 경험을 되새김질하면 되지 않겠냐지만, 아니지. 지금 바로 네 몫의 육아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주문으로 들려서 무서운 거야. 나는 저 소년의 활기를 얼마나 버텨낼지 자신이 없거든. 그래도 어쩌겠어. 해봐야지. 내가 건강해진 만큼 더 가져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