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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아빠 Apr 03. 2023

[몸일기 67] 이산저산 불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쿨하게 내년에 다시 올 벚꽃을 기다린다 해놓고선 저 미련을 보라. 아내가 아침 운동 삼아 출근길을 동행하기 시작하면서 포착한 꽃아재의 찌질함이다. 아, 꽃아재 말고 다른 이름이 필요하지 싶다. 꽃+중년, 꽃+*남 이런 조합을 붙이려면 잘생김이 필요조건이니까. 꽃 찍는 아재.

점심이 되니 양복 재킷이 무겁고 후텁지근하다. 4월의 문턱이 높아진 느낌이다. 식목일을 앞두고 내일은 비가 내린다니 다행이다만, 사철가 첫 대목처럼 이산 저산, 꽃이 피어야겠건만, 대신 불이 일고 있다.  


불은 무섭다. 그래서 기후 위기, 기후 재앙처럼 추상적인 말은 불로 번역되어야 맞겠다. 불이 밀어 닥치고 있다. 이산 저산 말고 내 뒷산에, 내 마당에. 내 가족의 목구멍으로 무시무시한 연기가 밀어닥치고 있다. 건조해서 불이 나고 산천의 초목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땅이 머금을 수 있는 수분이 더욱 줄어들고 다시 먼지가 날리면서 홍수에는 토사 유출이 더 심해지고, 가물 때는 더 불이나기 쉬운 조건으로 변하는 되먹임이 진행된다.


난 군 복무 시절 총 대신 물총을 쐈다. 그래서 불이 정말 무섭다. 불은 일렁이는 끄트머리에 물이 조금 닿는다고 꺼지지 않는다. 그 심지를 직접 보면서 겨누고 물을 쏘아야 잡힌다. 소방훈련을 하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코를 가리고 신속히 대피하라고 나오지만, 실제 불이 타오르며 발생하는 연기는 한번 마시면 기도가 다 타버린다. 비유가 아니다. 불에 타죽는 이는 드물다. 대부분 질식사이다.


콘크리트는 견고해 보이지만, 불길이 닿으면 어이없이 일순간에 무너진다. 첫 화재진압을 나갔을 때였다. 2층에 올라선 내 발을 떠받들고 있던 콘크리트 바닥이 일순간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내 발 바로 앞에서. 그때는 살았지만, 이제 그런 행운이 또 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당연히 믿고 기대하는 내일이란 기반의 밑에서 불이 지글지글 끓고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보니 내년에 다시 올 꽃을 막연히 기다리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에 사진으로 남겨둔 나의 지질함은 상당히 상징적이고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많이들 봐두자. 언제 불이 쓸고 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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