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범인은 이안에 있다'
이전 글에서 주한미군이 저질러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았거나, 해결되는 과정에 긴 시간이 걸렸던 예시들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그렇다면 주한미군범죄를 대처하는 이러한 복잡한 절차와 규정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무엇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지부터 주한미군범죄의 현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 글은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의 해당 부분에서 발췌, 편집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한미군사협정 SOFA
주한미군과 관련된 사항들은 흔히 주한미군지위협정이라고 불리는 SOFA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내에 머물고 있는 미군들의 지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는 협정으로, 미군이 우리나라에 상주하기 시작한 이후 필요성을 인식하여 우리나라 정부와 주한미군 간에 맺은 상호조약입니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Agreement under Article 4 of the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Regarding Facilities and Areas and the States of United Armed Forces in the Republic of Korea)'으로 약칭 한미 SOFA(States of Forces Agreement) 또는 '주한미군지위협정'이라고 부른다.
주한미군범죄의 역사
1945년 미군이 처음 한국으로 들어와 주둔한 이후 SOFA가 발효된 1967년까지 우리나라는 주한미군범죄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이 기간 동안의 주한미군 범죄와 그에 대한 수사, 재판 등에 대한 공식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1953년 한국전쟁 직후,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미군은 이를 근거로 한국에 주둔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상황에 맞추어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했지만 실제로 SOFA가 체결된 것은 그로부터 13년 후인 1966년에야 되어서였습니다. 이 이전까지의 모든 주한미군 범죄는 미군 당국이 재판권을 행사했죠.
특히 1957년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주한미군들의 총기 살인사건이 여러 건 일어났지만, 미군 당국의 군법회의에서 무죄 또는 급여 몰수, 불명예제대와 중노동형 등을 선고하는 것에 마쳤다고 합니다.
7월 6일 인천 미군 송유관에 올라앉아 있다가 미군의 총에 맞아 숨진 김용호, 당시 3살. 총을 쏜 미군은 군법회의에서 오발로 인정되어 무죄를 선고받음.
8월 25일 인천 용현동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사람들을 향해 미군이 이유 없이 돌팔매질을 하다 총을 발사하여 조병길(18세)이 숨진 사건.
9월 15일 군산 미군 비행장 부근에서 풀을 베고 있던 10대 소녀 7명을 향해 미군이 총을 발사하여 엄금순(17세), 김정애(18세) 2명이 숨진 사건.
10월 3일 경북 김천에서 열차 수리 중이던 미군이 길을 가는 학생 5명에게 정지 명령을 하였는데 학생들이 영문을 모르고 계속 걸어가자 총을 쏴 가장 뒤에서 걷던 송준원(15세)이 숨진 사건 등 총기 살인 사건.
SOFA 체결을 합의한 이후에도 지지부진한 협상 속에 계속되는 주한미군 범죄에 한국의 SOFA 체결 요구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62년에야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실무자급 협상을 정식으로 재개한 후 4년간 82회에 달하는 회의를 거쳐 1966년 7월 9일 협상이 타결되었고, 같은 해 10월 14일 국회를 거쳐 1967년 2월 9일에야 정식으로 발효되었죠.
협정 이후 첫 사건은 협정 발효일인 1967년 2월 9일 오후 3시 50분경 일어납니다. 군산 공군기지 소속 미 헌병대 데이비드 귤이 군용 지프차로 방삭순(11세)을 치어 상해를 입힌 후 도망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내게 되었지만 미군이 이를 공무 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주장하여 우리나라가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11일까지 폭행 1건, 상해 2건, 방화 1건, 교통사고 2건 등 총 6건의 범죄가 발생하였지만 역시 우리나라는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당시 우리나라가 재판권을 가질 수 있던 범죄 유형은 '특히 중요한 사건'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1967년 1,710건의 사건 중 9건만이 우리나라가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살인 2건 중 1건, 강간 14건 중 2건, 방화 8건 중 1건, 관세법 위반 21건 중 2건, 폭력행위 등 263건 중 2건, 상해치사 1건 중 1건 등). 이는 전체 주한미군범죄의 발생에 대한 재판권 행사율이 0.5%밖에 미치지 못함을 나타내며, 1968년의 경우 1,751건 중 14건의 사건에만 재판권을 행사하여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후 1991년이 되어서야 재판권 행사율이 1%에 이르게 되었죠(1,034건 중 14건).
이후 여러 불합리한 사건들에서 우리나라가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등 지속적으로 무력함을 보이게 됩니다. 특히 1992년 10월의 윤금이씨의 참혹한 죽음은 주한미군범죄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을 높였으며, 불공정한 SOFA 협정의 개정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다양한 단체와 국민의 노력으로 2001년 SOFA는 개정되었지만 여전히 주한미군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의 체포, 수사, 재판절차 등이 여러 분야에서 제약을 받고 있죠.
주한미군범죄의 현황 및 통계
SOFA 발효 첫 해인 1967년의 주한미군범죄 기록을 살펴보면 총 1,710건(1967년 2월 9일부터 12월 31일 까지)으로,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토대로 고려하였을 때 연간 2천 건 가까이 미군 범죄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특히 살인, 강도, 강간 등의 강력범죄 비중이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도별 증감률을 살펴보면 공식 집계가 시작된 1967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주한미군범죄가 1975년 2,383건 이후에 매년 지속적으로 감소, 1992년에 급격한 감소를 나타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2000년을 기점으로 전체 미군 범죄 발생 건수가 824명에서 575명으로 2백 명 이상 급감한 것은 1999년 10월 이후 피해액 200만 원 미만의 단순 대물 교통사고에 대해서는 불입 건한 제도를 시행하면서 통계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003년에는 3만 7천여 명이던 미군인이 2008년 2만 8천여 명으로 약 1만 명가량이 감소하는 것도 전체 주한미군범죄 감소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한미군범죄에 대한 재판권 행사율은 1990년대 한 자릿수에서 증가 추세를 보여 2003년부터 20%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사건 이후 미군 범죄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높아진 것이 한국의 재판권 행사율 증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재판권 행사 증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교통 관련(도로교통법 위반,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위반, 도주차량) 사건으로, 2002년 교통 관련 사건 재판권 행사율이 3%(211건 중 7건)이었음에 반해 2003년 20%(246건 중 50건)으로 증가하였고, 이후 2013년 29%(151건 중 44건)으로 증가하였습니다.
1990년대 70% 수준이었던 교통 관련(도로교통법 위반,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위반, 도주) 사건의 경우, 200만 원 미만의 대물 교통사고가 교통사고에서 제외되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60%대로 떨어져, 이후 2006,7년 40% 수준으로 감소하면서 상대적으로 상해, 강도, 손괴, 성폭력, 사기 등의 범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2013년의 자료를 살펴보면, 교통 관련(도로교통법 위반과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위반) 범죄가 45%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기타 항목 또한 14%를 차지하고 있어, 이 두 가지 항목이 이미 주한미군 전체 범죄의 60%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폭력, 상해, 폭행에 해당하는 비율은 18%, 성폭행(성폭력, 강간, 추행) 4%, 특가법(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4%, 물질적 손해를 주는 범죄(절도, 손괴, 사기, 공갈)가 14%로 나타났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주한미군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의 대처법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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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나도 주한미군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주한미군범죄 2화] (안드로이드/PC: 팟빵 아이폰: 팟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