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파감자 Jul 19. 2020

커피, 공간, 공동체

수줍게, 바리스타

취업사기, 비슷한 걸 당했다. 당했다는 표현 자체에서부터 풍기는 나의 분노가 지금은 머쓱하긴해도 당시의 나는 얼마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새로운 도전 앞에 호기롭게 꿈과 청춘을 외치며 회사를 관뒀지만 정작 그 도전은 눈앞에서 날 배반했고, 결국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날 인턴으로 채용하겠다던 회사는 이사에서 대표단으로 결제가 넘어가면서 반려되었고, 맥과 함께 얼이 빠진 나는 이성과 합리를 상실한채 몸부림 한 번 제대로 쳐보지도 못하고 뒷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렇게 나는 타의에 의해 자아성찰이라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기한없이 주어진 시간동안 그간 살아온 인생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돌이켜보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나갔다.몸이 아닌 머리와 가슴을 쓴다는 것도 쉬운 것 하나 없었지만 100일을 하루도 빠짐 없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글로 적고 이야기하면서 늦깍이 데미안이 되었다. 당시 스물일곱이었던 나는 기왕에 주어진 선택의 카드를 허투루 쓰고싶지 않았다. 학력, 자격증, 주변의 기대는 초기화시키고 재능, 관심과 취향, 나의 기대를 on 시켰다. 좋아서 찾아서 했던 일들, 관심 키워드, 추구하는 삶의 모습을 조합하니 얼추 윤곽이 잡혔다. 빈 스케치북을 채울 수 있는 여러가지 도구를 갖추게 된 느낌이었다. 가장 빈번히 쓰일 도구는 공간이었다. 다음은 공동체. 위로가 되는 공간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게 내 그림의 컨셉이 될 것이었다. 이를 풀어나갈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추상화든 정물화든 풍경화든 이제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면 된다! 


처음엔 공유 주택, 공유 오피스 회사들에 기웃거렸다. 정말 괜찮다 싶은 곳에만 정성들여 지원했다. 길어지는 구직 기간에 조급하게 굴다가는 더 깊은 방황이라는 늪에 빠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오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고, 용돈벌이도 좀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카페 알바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가니 흥미로운 곳들이 꽤 있었다. 약 세군데 카페의 지원서를 작성하고 마감일이 임박한 순서대로 제출할 계획을 세웠다. 단순히 알바로만 생각했던 가벼운 동기와는 다르게 지원서를 제출한 카페들은 자사 양식의 이력서를 요구했고 각 '회사'가 추구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빨리 구인을 마감하는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별난 곳이었는데, 질문중에 '공동체'에 대해 기술하는 부분이 있었고 커피 경력이라곤 1도 없는 나는 경력란 보다 공동체 질문에 더 신이 나서 적었더랬다. 화룡점정은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였는데, 마치 7개월(구직 기간) 동안 알 속에서 머리로, 날개죽지로, 하찮은 발로 세상을 향해 두드린 새가 알을 깨고 딛는 첫번째 걸음같았다. 나를 기다린걸까? 나를 위해 준비된 곳인가? 카페에 지원한다기보다 7개월의 나를 갈아넣는 기분이었다. 이력서를 완성하고나니 나라는 사람이 정리가 됐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조짐이 좋았다.

작가의 이전글 무슨 일 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