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떼
그런 때가 있다. 일에 떠밀려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하는 날들이 연이어 이어지는 시기. 사무실이 아닌 현장을 견뎌야 하는 몇 개의 굵직한 일들을 마무리하고도 온몸에 긴장은 풀리지 않았고, 지나간 일의 아쉬움을 곱씹고 다음에 해내야 하는 일을 허공에 그려보느라 침대에 누워있어도 전혀 잠들지 못하는 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반차를 냈다. 스트레스가 큰일들이 얼추 끝나가던 참이었다. 몇 가지 일들이 남았지만 도무지 오후 시간을 버텨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전에 급한 일들을 모두 쳐내고 오늘 점심으로 먹으려고 했던 정기 구독 샐러드를 가방에 담아 뱀처럼 사무실을 빠져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하루 평균 왕복 2시간 30분에서 3시간가량을 회사와 집을 오가는 데 쓴다. 문밖을 나서. 10분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지하철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 4호선을 거처 2호선으로 환승해. 그냥 낑겨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고 살아나 테헤란로에 있는 사무실에 도착하지. 이렇게 매일을 반복한다. 대학생 때부터 경기도에 사는 서울 방문자로서 지하철을 오래 타는 일에는 이골이 났지만 지친 날들이 계속되는 시기에는 서울이 너무나도 싫어진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서 반차냈어. 김밥 사갈까? 토스트? 알겠어.”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엄마한테 전화를 건다. 집으로 가는 마을 버스를 타기 전에 김밥집에 들러 내가 먹을 김치참치 김밥을 사고 편의점에서 컵라면도 하나 산다. 토스트 가게에서 10분을 기다렸고, 버스는 거의 바로 탔다. 온몸이 천근만근 바스러질 것 같지만, 집 앞으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 옷차림을 보고 웃음이 난다. 분홍색 수면 바지에, 매일 입는 청록색 반팔 위에 회색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웃고 있는 우리 엄마.
엄마한테 사 온 음식들을 넘기고 나는 202호 우리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은 후 201호로 넘어간다. 엄마가 컵라면에 물을 부어놔 바로 먹기 딱 좋게 익었다. 라면 국물을 한입 삼켜 목을 축이고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다. 김밥 세 알을 남기고 부른 배를 두드린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시장에서 6개에 만원을 주고 사 온 참외를 깎아 먹으면 입가심까지 완료다.
201호 안방에서 자볼까 주인장에게 물으니, 친구들이랑 통화를 많이 해서 아마 시끄러울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공간에서 또 잠이 안 올까 두려웠지만 엄마랑 싸우기는 싫으니까. 우리는 가깝고도 멀게 떨어져 산지 오래돼서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때를 알고 있다. 서로의 공간과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다시 202호로 떠나는 나를 배웅해주면서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한다.
“나 이따 요가 갈 거니까 깨워줘.”
“몇 시?”
“한 7시?”
“알겠어.”
7시가 됐다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긴 했지만, 바로 일어나지는 못했다. 엄마가 옆집으로 돌아가면서 닫히는 도어락 잠기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선잠을 자다 눈을 뜨니 7시 30분이다. 7시 50분 요가에 가려면 적어도 30분 전에는 집에서 나가야 하는 데, 틀려먹었다. 몸과 머리는 한없이 가벼운데, 요가를 못 가다니. 이대로 허망한 저녁 시간을 보내야 하나 허탈함에 휩싸여 고민을 하다, 9시에 시작하는 하타 요가 수업을 듣기로 한다.
하타 요가는 한 동작을 오래 유지하며 몸 뒷면을 피는 전굴과 몸 앞면을 활짝 여는 후굴 위주라 정적이면서도 깊게 호흡할 수 있어 좋아한다. 나마스떼. 마지막 인사를 하는 선생님이 한 마디 덧붙인다. 이 요가원에서는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고. 오전 수업을 하는 요가원에서 오후 수업도 맡게 됐다고. 집과 요가원이 멀었는데, 잘된 일이라고. 아, 정말 오늘 왜 이래. 내가 정말 좋아하던 선생님이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요가원에서 처음으로 거울을 보지 않고 아사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요가 매트 배열을 바꿨던 선생님이었다. 절반이 플라잉 요가인 시간표 사이에서도 전통 요가를 전파하며 꾸준히 요가원에 나가게 해준 선생님이 떠났다.
어쩌겠는가. 아쉬움을 그득 안고 집에 돌아오는 길. 수업이 9시에 시작해 10시에 끝났으니까 집에 도착하면 얼추 10시 30분쯤 된다. 점심으로 먹은 라면과 김밥은 모두 소화됐고 운동까지 해서 더 배고프다. 엄마와 아빠는 일찍 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되도록이면 201호에 가지 않는 게 좋다. 202호 냉장고에 넣어둔 샐러드를 꺼낸다. 책상에 앉아 물 한 잔을 따라 조용히 씹는다. 집에 잘 들어왔냐고 묻는 엄마와 통화를 마치고 유튜브를 보며 먹는 샐러드는 점심시간에 사무실 공용 공간에 구겨져 먹는 것과 또 다른 맛이다. 더 달고 꼬숩다.
샤워를 하고 하루를 회고해본다. 먹고 자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누군가 곁에 있어 평안하다는 감각을 알아차린다. 몸이 온전하게 회복되면 정신도 건강해진다. 나락에 빠져 한동안 허우적거려도 내가 나를 챙겨야 회복할 수 있다. 아쉬운 헤어짐에 묻은 미련은 빨리 씻어내지 않아도 괜찮다. 엄마 옆집에 살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