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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란 Oct 18. 2022

조카 오는 날

202호로 이동!

그 애를 처음 만난 건 생후 100일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거듭되는 팬데믹 때문에 그 애가 처음 세상을 만난 시기에는 직접 환영하지 못했다. 남동생이 타 지역으로 출장을 나가 있는 바람에 올케는 남편도 없이 친정집에서 그 애를 100일이 넘도록 키워냈다. 그간 매일 같이 그 애가 잘 살아 숨 쉬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수도 없이 봐왔다. 설익은 빨간 감자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올케의 친정과 가깝고 인적이 드물어 전염병에 걸린 사람도 없을 것 같은 할머니집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먼저 도착했고 기다림이 지겨워질 때쯤 그 애가 들어왔다. 실제로 본 그 애는 카메라가 담아낸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건 내 조카라 팔이 안쪽으로 굽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이렇게 어여쁜 갓난쟁이는 그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그 애가 바스러질까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첫 만남이었다. 


그 애가 세상에서 살아낸 날이 길어질수록 그 애가 더 좋아졌다. 한 번도 걷지 않아서 젤리같이 말랑한 발바닥, 내 품에 안았을 때 이 사람은 누구지 하며 고개를 가누며 쳐다보는 눈빛, 그 애에게 풍기는 포근한 바디로션 냄새까지. 그 애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그 애가 더 보고 싶어졌다. 그 애의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내 그리움의 크기와는 반비례하게 조카를 자주 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산다. 그래서 한 번의 만남이 너무나도 귀하다. 그 애가 우리 집에 오기로 한 날에는 201호와 202호에 사는 사람들은 분주해진다. 먼 걸음 행차하느라 고단할까 황송한 마음으로 그 애를 맞을 준비를 시작한다. 


평소에는 집에 가기 바빠 쳐다보지도 않는 회사 앞 현대백화점 식품관에 가서 그 애의 간식을 고른다. 살아온 개월 수에 적합한 과일 퓨레와 달지 않게 나온 밤, 사진에서 많이 들고 있던 떡뻥을 계산한다. 엄마는 베개 커버와 이불을 빨기 시작한다. 아빠를 닦달해 마트에 가서 남동생이 좋아하는 밑반찬 거리와 그 애가 먹을 국거리 고기를 카트에 잔뜩 담는다. 


대망의 그날. 온 가족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어디쯤 왔는지 전화로 재차 확인하고 기대감에 들떠 춤을 춘다. 디지털 매체로 전해지는 사진과 동영상으로는 그 애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사진으로 보면 엄청 큰 어린이 같았는데, 실물을 영접하면 너무 작다. 만지면 부서질 것 마냥 작고 소중하다. 


그 애는 보고 있어도 자꾸만 보고 싶어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것이 정말 사람인가? 정녕 인간이라는 게 이토록 존재만으로도 이토록 값질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애와 눈높이를 맞추려 201호 방바닥에 딱 달라붙어 온갖 아양을 떨며 추근덕거린다. 


나보다 더 질척거리는 건 201호 남자다. 서슴없이 사랑한다는 말도 엄청 많이 하는데, 그건 그 애 아빠는 물론 피를 나눈 나조차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 처음 들었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하도 많이 염불을 외는 바람에 익숙해져 버렸다.


모든 버전의 아기 상어 노래를 듣고 또 듣고 그 애가 잘 시간이 되자 씁쓸하게 202호로 퇴장하는 우리들. 202호 호스트인 나는 201호 주민들을 게스트로 맞이한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그 애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201호를 통째로 내어줘서다. 사실 202호에 남자를 들이는 건 극도로 꺼려하지만 이날만큼은 어쩔 수 없다. “왜 내가 안방 놔두고 거실에서 자냐?” 남자 게스트를 거실로 내쫓으려는 계획은 그의 당당함에 무산되고 만다. 


201호 게스트들은 미리 준비해둔 이불을 202호의 명물 침대 옆에 깐다. 한 달에 한번 켜질까 말까 한 TV가 켜지고 쉴 새 없이 정착하기 마땅한 채널을 찾느라 리모컨을 눌러대는 남자의 손놀림이 이어진다. 202호의 평온함은 그렇게 묵살되고 마는데… 


띡띡띠띠디딕


201호 사람들보다 몇 배나 빠른 템포로 도어락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남동생이다. 그의 왼팔에는 그 애의 엉덩이가 얹혀 있다. 침대와 바닥에 각기 다르게 누워있던 우리는 한마음으로 추가 게스트를 반긴다. 그 애는 오랜만에 보는 어른을 보고도 낯설어하는 법이 없었지만 곁을 쉽게 내주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손길이 닿는 곳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끄집어내서 맛보고 던져버린다. 그러면 나는 자존심도 없이 물건을 다시 제자리에 놓는 동시에 그 애의 관심을 끌만한 다른 물건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놀다가 진짜 자야 할 시간이 오면 다시 201호로 돌아가는 그 애. 


내일 다시 만나.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몇 개의 번호만 누르면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곳에 있지만, 202호 사람들은 201호 그 애를 그리워하며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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