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란 May 08. 2021

제사를 돕지 않기로 했다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세상을 등지면서 할머니는 반세기 동안 지내온 제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장남인 아빠가 아니, 엄연히 말하자면 그의 아내인 엄마가 할머니가 진두지휘하던 제사를 물려받았다.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내게 된 지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수없이 집 안 여성들을 갈아서 지내는 제사의 유해함에 대해 항변해 왔지만, 누구에게도 먹히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었다.


아빠는 조상님이 가족을 지켜주기에 우리가 큰 탈 없이 살 수 있는 것이라며 제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늘에서 조상님이 우리 가족을 위해 애써주고 있다고.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으로 조상님에게 보답하는 제사를 꼭 지내야 한다고. 비싼 한우가 들어간 고깃국과 제철 과일들이 나열된 제사상은 기나긴 마트 영수증과 엄마의 한숨으로 채워진 걸 나는 안다.  


아빠의 확고한 제사 의지를 무시하고 내가 제사상을 차리지 않을 수 있게 된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1. 제사에 관심을 꺼라

가장 먼저 나는 제사 전날 함께 장을 보러 가지 않았다. 제사상에 올라갈 음식들이 얼마나 좋고 비싼 재료로 만들어지는지 신경을 껐다. 괜히 마트에 따라가서 무조건 최고급을 고집하는 아빠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장보기에 참여하지 않는 건 쉬웠다. 굳이 나까지 장을 같이 보러 가지 않아도 됐으니 적당한 핑계를 대고 빠지면 그만이었다. 또 평소에 함께 장을 보러 가는 횟수도 줄였다. 웬만하면 우리 가족이 먹고사는 일에서 참견 지분을 줄이고 싶어서다.


2. 제사가 가진 모순을 끊임없이 얘기해라

가장 힘든 일은 제사가 있는 당일 날 참여하지 않는 건데, 장은 같이 안 봤어도 제사 음식을 만들고 제사상을 차리는 일에는 내가 필요했다. 일종의 주방 보조이자 서빙을 담당한 내가 빠진 제사는 빈자리가 컸다. 아무리 자는 척을 해봐도 누군가에게 깨워져 부엌으로 끌려갔다. 일부러 제사가 끝난 후인 자정이 넘어서 집에 들어가면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이날도 상을 받는 주인공 이름도 모른 채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너무 짜증 났다. 내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존재해준 조상의 죽음을 기리는 건 이해한다 이거야. 근데 왜 그걸 제사 주인공과는 피도 한 방울 안 섞인 우리 엄마가 해야 하냐고. 거기다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아들은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앉아있냐. 동생은 남자라 절만 하잖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제기에 약과를 옮겨 담다가 엄마에게 그냥 툭 던졌다.


“왜 쟤는 제사를 지내기 바로 직전에 일어나서 절만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데 나는 장 보는 것부터 다 도와야 해? 나도 제사 지내기 싫어.”


그냥 평소에 하는 푸념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생각했다. 나는 항상 집 안의 여성들만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남성들은 퍼포먼스만 담당하는 게 싫었고, 저 발언 또한 같은 맥락이니까.


“그러게, 그렇네. 너도 하지마”


별 기대 없이 뱉은 말에 엄마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3. ‘장녀본능’을 죽여라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내 방에 들어가 누웠다. 아빠도 토를 달지 않았다. 아마도 엄마는 ‘우리 딸이 나 혼자 힘들게 제사상을 차리는 데 설마 안 도와주겠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을까? 자발적으로 제사상을 차리게 만드는 거지.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 제사상을 차리지 않는다. 혼자서 힘들게 제사상을 차리는 엄마와 그걸 불안하게 지켜보는 나의 ‘장녀본능’을 죽였다.

내가 돕든 돕지 않든 제사는 지낸다. 엄마는 계속 제사상을 차려낼 것이다. 나는 엄마가 아닌 나를 위해 엄마가 힘들어 보여도 외면했다.


내가 빠지자 아빠가 엄마를 돕기 시작했다. 아빠가 음식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내가 해왔던 제기 서빙하기, 제사상 치우기 등을 한단다. 가만히 앉아서 엄마와 내게 이거 가져와라 저거 가져오라 지시하던 아빠의 모습이 사라졌다.


4. 제사를 없애겠다는 목표를 기억해라

집 안에 제사를 없애는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나만은 빠져나왔다. 엄마가 넌지시 제사 일정을 브리핑해도 남의 일인 것처럼 반응한다. 여전히 아빠는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엄마의 희생 따위는 무시한다. 엄마는 힘들지만 아빠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데, 나는 집 안의 여성을 갈아서 만드는 제사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없앨 계획이다.


다른 사람들의 레퍼런스를 모으고 실행 방법을 모색할 예정이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방법으로는 절에 제사를 외주 맡기는 방법이다. 제사 파멸  방법을 모색하는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싶다. 최종적으로 제사를 없애기 위한 나의 노력은 계속된다.

이전 11화 호칭 실명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