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사라지는 김치
한국에서는 숨 쉬듯이 당연한 일상이었던 냉장고 속 김치.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한가득 싸 오거나 바빠서 가지 못해도 때맞춰 택배로 도착하곤 했던 것이 엄마의 김치였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는 그저 그리워만 하던 그런 김치가 냉장고 속에 있었다. 그것도 세 통이나.
여행 중간에 산과 둘이서 힘들게 이사를 하고, 베를린의 호텔에 머무르시던 시부모님을 집으로 모시러 간 날이었다. 어떠한 가구도 없이 텅텅 비어있던 새 집에 들어와서 하루 만에 겨우 침대와 소파베드, 테이블을 조립한 뒤였다. 한식당에서 고기와 돌솥비빔밥, 김치찌개를 해치우며 행복해하는 우리를 보고는 두 분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너희 김치 만들어 줄게~.”
눈이 번쩍 뜨였다. 김치? 설레면서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과연, 독일에서 파는 재료로 김치를 만들어도 맛있을까? 여긴 젓갈도 없고, 고춧가루도 별론데.
“고춧가루는 우리가 가져왔어. 젓갈 안 써도 소금으로만 간단하게 하면 돼~”
흠. 남도에서 자란 데다 엄마의 손맛으로 맛에 대한 기준이 높은 나는 서울토박이신 어머님의 말씀에 의문을 품었다. 젓갈이 없는 김치라. 그건 뭐 앙꼬 없는 찐빵이랑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됐어. 바쁘고 시간도 없는데 안 해도 돼.”
응? 잠깐만. 해주신다는데 왜 거절을 하지? 맛이 어떨지는 몰라도 김치를 해주신다는데? 나는 산의 말에 다급하게 덧붙였다.
“해주시면 저희는 감사하죠~”
“됐어. 무슨 김치야. 이틀 후에 다시 여행 가는데 그걸 지금 해서 어떡해.”
“지금 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녀와서 먹으면 되지! 그때 되면 잘 익겠네~”
산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열의를 보이셨다. 집에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배추, 파, 마늘, 소금 등의 재료와 김치를 넣어둘 통을 여러 개 샀다. (독일에서 배추는 Chinakohl–중국배추라는 이름으로 일반 슈퍼에서도 종종 판매한다. 우리가 서양에서 온 배추를 양배추라고 하는 것과 정확히 반대로 그들에겐 양배추가 그냥 Kohl이다. 배추 이름이 중국배추인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다.) 괜한 일을 한다며 마음에 안 들어하는 산과 달리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속으로 조금 신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김치가, 우리의 냉장고에서 긴 여행에 지쳐 돌아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치를 발견하고 기쁜 마음도 잠시, 냉장고에는 김치 외에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일요일이어서 슈퍼는 물론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다. 다행히 공항에 연중무휴로 운영하는 슈퍼가 있어서 우리는 공항까지 가서 간단한 재료들을 샀다. 집으로 돌아와 산이 휘리릭 두부 덮밥을 만들었다. 그 옆에서 나는 김치통의 뚜껑을 열었다. 잘 익은 김치가 탐스러웠다.
그릇이 하나도 없어서 어머님이 한국에서 가져오신 스테인리스 볼에 두부 덮밥을 담고, 그 옆에 옮겨 담은 김치를 놓았다. 새 집에서 한 첫 요리였다. (물론 내가 한 건 아니지만…)
밥에 곁들여 먹은 김치는 생각보다 더 맛있었다. 집에서 먹던 경상도식 진한 김치는 아니었지만 깔끔하고 시원했다. 무엇보다 우리 집에 김치가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맛있는데?”
“그치! 맛있어!”
“엄마아빠가 하는 거 보니까 쉽던데? 김치 만들어서 먹으면 될 것 같아. 우리 이제 눈치 볼 사람도 없고, 냉장고도 자리 넉넉하니까.”
“그러니까! 우리 이제 김치 만들어서 먹자!!!”
그렇게 우리의 유(有)김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김치를 만들고 새 김치를 반찬으로 매 끼니 먹었고 2-3주 후에 김치가 맛있게 익으면 그때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두부김치 등 볶고 끓이고 지져서 먹어 치우는 바람에 짧게는 3주, 길어도 한 달이면 5킬로의 김치가 동이 났다.
“힝… 김치 또 다 먹었어…”
나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면 산은 한숨을 쉬면서 다시 배추를 절이고, 마늘을 까고, 파를 쫑쫑, 무를 채 썰었다. 우리 집 김치는 우리의(아마도 나의) 입맛에 맞춰서 점점 발전했다. 젓갈 대신 피시소스를 넣고, 쌀가루를 사서 풀도 만들었다. 김치를 만드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우리 만의 김치 레시피가 점점 완성되고 있었다.
몇 달 전, 한국에 갔을 때 엄마가 먹고 싶은 음식이 있냐고 물었다. 예전의 나는 언제나 엄마의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엄마의 김치찌개가 생각나지 않았다. 반찬으로 먹은 엄마의 김치도 너무 시게 느껴졌다. 오래 익은 신김치라 당연한 일이었지만, 익숙한 그 맛이 왠지 낯설었다. 나이 든 엄마의 맛이 변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내가 엄마의 맛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베를린에 돌아오자, 산의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엄마의 품을 떠나 나는 산의 품으로 온다. 어른스러운 딸이어야만 했던 채로 엄마의 품에서 나온 나는 어린애처럼 떼쓰는 어른이 되어 그의 품에 안긴다.
“김치찌개 먹고 싶어.”
“질리지도 않아?”
“응. 안 질리는데. 이제 자기가 해준 김치찌개가 제일 맛있단 말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는 주방으로 가고, 잠시 후 김치 볶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진다.
“도와줄까?”
“됐어.”
주방을 기웃거리다 소파로 돌아온다. 달콤하고 새콤한 김치와 돼지고기 기름이 뒤섞인 냄새를 맡으며 누워서 빈둥대다 보면 산이 나를 부른다. 빈둥대지 않은 척하며 재빠르게 가서 수저를 놓는다.
곧이어 식탁엔 푹 익은 김치가 든 새빨간 김치찌개가 오른다. 프라이팬에서는 달걀 프라이가 지글지글 익고 있다. 동그란 노른자가 살아있는 건 내 밥 위에, 터져서 못생겨진 건 산의 밥 위에. 간장과 참기름도 곧 합류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미김까지.
“난 평생 하나만 먹고살아야 하면 이걸 고를 거야.”
“김치찌개?”
“아니. 김치찌개랑 간장계란밥이랑 김.”
“그건 하나가 아니잖아. <올드보이> 군만두처럼 딱 하나만 골라야지.”
“아니야. 세 개 다 있어야 해. 그리고 김치찌개는 자기가 끓여준 거.”
“그게 뭐야, 바보냐.”
잘 먹는 나를 보며 웃는 당신이 좋아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마음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