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암 수술
얼마나 즐거운 여름을 보냈는지 보트리엔트 부작용으로 하얘진 얼굴이 다시 새까매졌다. 입원 수속 후 배정받은 병실로 올라가 환자복으로 갈아입는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 아쉬울 것 없이 여름을 즐기기도 하였고 암 환자로 살아가면서 감정을 많이 덜어내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회복 기간이 끝나면 다시 평온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수술 정도야 마음을 쥐고 흔들 것은 되지 못했다.
병동도 일반 외과 병동이 아닌 간호병동으로 배정받았다. 그 말은 24시간 상주 보호자가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수술받기도 전에 대소변이 걱정되었다. 병실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데 간호사가 수술 안내문을 들고 자리로 찾아왔다. '복강경 위 수술'에 대한 설명이 빼곡하게 쓰여있었다. 분명 발생 부위는 소장이라고 하는데 왜 자꾸 위 수술이라고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복강경이면 개복보단 덜 아프겠지?
작년에 받은 개복 수술과는 달리 이번엔 관장이나 혈전 방지용 스타킹 착용 등 수술 전 준비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주는 바가 없다. 또한 수술 후 폐기능 강화를 위한 공 올리기는 운동기구도 주지 않았다. 금식 처방이 없어서 먼저 병동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딱히 금식을 하라는 말은 없다고 한다. 저녁밥을 싹싹 비우면서도 위 수술인데 음식물이 가득 차있어도 되는지 의문이 계속 들었다. 잠깐 다녀간 외과 교수님도 이번 수술은 한 시간 정도면 금방 끝날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수술 당일이 되었다. 이송 침대에 누워 실려갈 때에는 항상 무력감이 느껴지다 못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이동 수레에 실려 맛깔스럽게 정형되러 가는 고깃덩이가 된 것 같았다. 수술장 입구에 다 와가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다가 보호자 대기실에서 이모와 함께 손을 흔들고 있는 엄마를 발견하였다. 자격증 시험 보러 들어가는 딸내미 응원 온 것 마냥 손을 흔드는 엄마와 이모에게 나도 손을 흔들고는 수술장으로 들어갔다.
대기실에 누워 번갈아 찾아오는 마취과 의사들에게 이름, 생년월일, 수술명, 수술 방식 등 서너 번 반복했다. 복강경 수술로 알고 있다는 말에 의사들은 당황스러워하다가 교수님은 개복 수술을 계획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다시 배가 열리는 건 싫었지만 그저 빨리 수술을 받고 다시 이곳으로 실려 나와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바람이 통했는지 예상보다 수술실로 일찍 실려갔다. 이번 수술실은 꽤나 구석에 있는 곳이었다. 이송 침대에 실린 채로 굉장히 오래 이동했던 것 같다. '엄청 멀리 가네.' 혼자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들렸는지 의사가 말을 걸었다.
"되게 덤덤하시네요."
"무서워해봤자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참 긍정적이시네요."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저 체념했을 뿐인데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 년 만에 다시 실려오게 된 수술실은 눈꼽만큼도 반갑지 않았다. 앞으로 이렇게 1년에 한 번씩 수술실을 오게 되는 걸까. 언제까지 수술로 더듬더듬 일상을 이어나가야 하는 걸까. 그나마 수술을 받는다는 건 운이 좋은 것이다. 이러다 손쓸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면 수술실에 누워 있는 지금이 차라리 그리워지게 될까.
춥고도 새하얀 수술실 침대에 옮겨 누우니 몸 곳곳에 무언가가 계속 붙고 연결된다. 맨 처음 수술 때는 눈물도 글썽이고 의사들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도 했는데 이번엔 그냥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알아서 해주겠지.
눈을 떴을 땐 몽롱함을 뚫고 또다시 배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회복실 시계로 초점을 모으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게 확인이 되었지만 언제 수술이 끝나서 회복실로 이송되어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실에 올라와 있었다. 엄마가 옆에 있던 것도 같은데 간호병동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는지 뚜렷하게 정신이 돌아왔을 땐 엄마는 없었다.
전날 복강경 수술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들었던 보람 없이 배에는 기다란 개복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1년 간 겨우 새살이 돋아난 자리가 다시 갈라져 있었다. 계획대로 수술 시간은 한 시간 정도로 짧았고 뱃속에는 총 4개의 종양이 있었다. 4~5cm 정도 되는 굵직한 것들이었다. 종양은 CT를 찍는다고 해서 100% 다 발견되는 게 아니었고 배를 열어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내 몸조차 어찌할 도리가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발생 부위가 위도 소장도 아닌 장기를 보호하는 지방벽(?)이라서 장기 절제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장기 절제가 없어서 수술 후 곧바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제 또 회복에 힘써야 빨리 퇴원을 하기 때문에 열심히 밥을 먹고 열심히 걸어 다녔다. 개복 후 3일 만에 퇴원을 할 수 있었다.
한 여름에 수술을 하고 회복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배에 붙은 거즈는 땀과 엉겨 수포가 일어나고 미칠듯한 가려움으로 이어졌다. 개복수술 부위에 또다시 재개복을 한 상태라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다며 철심을 뽑고 실밥을 제거하는데 2주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수술부위 상태도 꾸준히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이틀에 한 번 꼴로 병원에 방문해서 외과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으면서 가려움은 점점 심해졌다. 지금도 수술부위 주변으로 열심히 긁어 댄 상처가 흉터로 남아있다. 샤워도 할 수 없어 몸에는 제법 환자다운 시큼함이 더해졌다. 별생각 없이 매일 하는 샤워와 머리 감기가 엄청난 체력과 기술을 요하는 육체노동임을 절실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