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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랑 Feb 25. 2024

한 달 먼저 끝낸 여름

벼락치기로 여름 즐기기

부모님은 큰딸이 또 한 번의 힘든 수술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다시 가슴에 난도질을 당해야 했다. 슬퍼한다고 바뀌는 건 없다. 수술을 이겨내고 다시 지금처럼 건강한 삶을 살아가면 된다. 이미 수술 날짜는 정해졌고 남은 열흘 동안 충분히 여름을 즐기는 것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할 뻔한 적이 세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이 좋은 나는 이번 여름엔 더더욱 물속에서만 지내기로 했다. 올해도 돌아온 엄마의 생일을 맞이하여 우리 가족은 가평의 한적한 계곡으로 여행을 떠났다. 3m는 가뿐히 넘을 것 같은 계곡의 깊은 수심도 두려움 없이 오르내리며 입술이 까매지는 줄도 모르고 물놀이를 했다. 거의 강원도 화천까지 닿는 가평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깊은 산골짜기 펜션엔 밤새도록 얼큰한 노랫소리와 춤사위로 가장한 몸부림으로 가득 찼다.

 

며칠 뒤 또 물놀이를 떠났다. 계곡물에 몸을 담갔으니 이번엔 바닷물이다. 동생과 함께 강원도 고성군 봉포리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을 찾았다. 허름한 모텔의 하루 숙박료보다 비싼 값으로 백사장 위의 평상 하나를 대여해 놓고 물놀이와 낮잠을 반복했다. 웬만한 성인의 머리는 훌쩍 넘을 정도로 매우 깊은 수심이었지만 그 바닥이 투명하게 다 보여 전혀 깊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맑은 바다였다. 스노클링 장비를 입에 물고 새끼 숭어와 가자미, 그리고 이름 모를 작은 물고기들 까지 생태 체험(?)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더니 어느새 손과 발은 따가운 여름볕에 짓물러버리고 말았다.




문화생활도 다양하게 즐겼다. 도서관에서 '이번 달 추천 도서' 목록에 선정된 책들을 골라 하루 한 권씩 읽었고 2023년 여름 극장가를 휩쓴 영화 ‘밀수'와 '엘리멘탈'도 하루 사이로 관람했다. 우연히 얻은 티켓으로 서울역 전시회도 가보았다. 내가 가진 지식만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작품들을 느린 걸음으로 찬찬히 살펴보며 교양 있는 척도 해보았다. 문화생활을 핑계 삼아 그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과 카페 투어를 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 며칠 사이 품위와 체중이 부쩍 올라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을 하면서 문화생활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야 하는 하루하루가 벅찰 정도로 바빴지만 덕분에 방구석에서 한숨 쉬며 수술 날짜만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오히려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 입원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입원 전 날에는 동생과 이천 설봉공원으로 향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멜로망스의 라이브 공연을 꼭 보고 싶었는데 운 좋게도 바로 옆 동네 축제의 초청 가수로 섭외가 되었다고 한다. 그 축제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저녁 7시 공연이었지만 동생과 나는 4시부터 공원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아 더위와 싸웠다.


해 질 무렵, 언제 더웠냐는 듯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드디어 공연 시간이 되었다. 아담한 무대와 그를 둘러싸는 많은 관중들, 시원한 여름밤공기까지 완벽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무대의 주인공인 멜로망스가 등장했다. 다리를 다친 듯 목발을 짚고 등장해서 의자에 앉는 순간까지 부축받는 모습을 보고 절로 짠한 마음이 들었다. 팬들의 목소리에 묻어가듯 "아프지 마!"를 함께 외치는데 누가 누굴 보고 아프지 말라는 건지 헛웃음이 절로 났다. 당장 내일 수술을 앞둔 암 환자에게 위로받는 다리 다친 유명 가수라.


그들의 노래는 음원을 통해 들어왔던 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음원이 나긋나긋한 플루트 같다면 실제로 듣는 라이브는 그보다 훨씬 우렁차고 에너지 가득했다. 기대를 잔뜩 하고 왔지만 기대 이상의 무대였다. 약 40여 분의 공연이 4초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앵콜곡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들의 대표곡까지 들을 수 있었다.


'너를 알게 된 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예뻐 보여‘


다르게 해석하면 내 상황과도 꼭 맞는 가삿말에 잠시 슬퍼졌다. 벼락치기하듯 바쁘게 흘러간 2023년의 여름은 가장 예쁜 것들로만 가득 차기도 했다. 아프지 않았다면 전혀 느끼지 못했을 사소한 것 까지도 전부 소중하고 예쁘게 느껴졌다. 앵콜곡까지 완벽한 무대를 마치고 다시 목발과 부축을 통해 불편하게 퇴장하는 그 뒷모습과 함께 나의 여름도 끝이 났다.


늦은 밤이 되어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차 안에는 멜로망스 노래로만 가득했다.


"야, 근데 생각보다 목소리 엄청 크지 않냐. 성량 쩌는 것 같아."


아직도 라이브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나에게 동생이 한 마디 내뱉었다.


"스피커 음향을 크게 했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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