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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랑 Feb 25. 2024

차라리 머리가 다 빠져버렸으면 좋겠어

보트리엔트 부작용

“그래서 나 다시 항암 해야 된대. 먹는 항암약으로 처방받아왔고 내일부터 먹을 거야.”


'보트리엔트'라고 쓰여있는 작은 약상자 두 개와 항암 부작용이 적힌 종이 꺼내며 얘기했다. 아니 통보했다. 그리고 부모님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가 왜 혼자 끌어안고 있었냐고 말했던 것 같다. 조금의 정적이 흐른 뒤 엄마는 '에라 모르겠다'는 뉘앙스로 근사한 술상을 내오셨다.


"오늘 마음껏 먹고 또다시 이겨내 보자."


부모님과 나는 오랜만에 술상을 마주했다. 막걸리를 얼큰하게 마시고는 엄마와 비 오는 밤에 산책을 나가게 되었는데 뒤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세상이 뭐 이렇게 개 같니. 진짜 개 같다."는 말도 반복해서 들렸다. 엄마도 개 같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새삼스럽기만 할 뿐 당사자인 나는 딱히 슬프지도 또 세상이 개 같지도 않았다. 작년부터 이미 개 같던 세상이다.


동생에게는 카톡으로 모든 상황을 이야기했다.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또 치료 잘 받자는 말로 의기투합을 했다.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았기에 알 길이 없었지만 동생도 당시에 많이 울었다고 한다. 동생이라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울음바다가 되는 가족을 보는 건 끔찍한 일이다. 2023년 5월 29일, 두 번째 항암(보트리엔트 항암)이 시작되었고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무너져야만 했다.




이번 항암은 비교적 수월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공복에 보트리엔트를 두 알씩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보트리엔트를 먹기 시작하고 일주일은 입에 쓴 맛이 돌고 무기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기력함은 항암제를 먹고 있다는 데서 비롯한 일종의 '기분 탓'이었던 것 같다. 3주 뒤부터는 팔과 다리에 털이 하얘지고 한 달이 넘어서야 구레나룻부터 시작해 머리카락이 조금씩 희끗희끗해졌다. 탈모 부작용은 없다고 했지만 정수리가 허전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가 많이 빠졌다. 체감상 25% 정도는 머리숱이 줄어든 듯했다. 모자를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했다. 머리가 온전히 살아있는 항암은 없나 보다.


연초에 긴 여행을 다녀온 터라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렸는데도 보트리엔트 복용 한 달 만에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피부 회복이 어쩜 그리 빠르냐는 말을 꺼낼 정도였다. 한 번은 여름옷 쇼핑을 위해 이천 아웃렛으로 갔을 때였다. 평소에 좋아하던 W 매장에 들어가 옷을 고르고 있었다. 매장에 전시된 큼지막한 반팔티를 살펴보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직원이 "따님 옷 고르시는 거예요?"라며 말을 걸었다. 그 매장에 있는 손님이 나밖에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건넨 말인지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 한마디에 상처받아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매장을 빠져나왔고 바로 주차장으로 가서 운전석에 앉아 거울 속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머리 조금 하얘졌다고 하루아침에 박시한 반팔티를 입힐 딸이 생겨버린 것이 서러웠다.


그 외에 눈에 띄는 부작용은 조금의 설사가 전부였다. 생각보다 부작용이 너무 없어서 외래 때 교수님께 '너무 부작용이 없어서 약이 잘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푸념했더니 약효와 부작용이 상관없는 약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여주셨다.


보트리엔트를 복용하고 두 달이 지났다. 약이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는 CT 검사 날이 다가왔다. CT검사를 하기 전, 교수님께서는 보트리엔트 특성상 증상부위가 조금 부었다가 작아지는 양상이 있기 때문에 이번 검사에 병변 조금 커지게 나타나도 너무 신경 쓰지는 말라 하셨다. 그 말을 위로 삼아 마음 편한 일주일을 보내보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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