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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랑 Feb 25. 2024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전이 의심 소견

"이 정도는 감기 잠깐 앓기만 해도 생기는 거긴 한데 일단은 계속 지켜보도록 할게요"


간절곶에서 간절히 빌었던 꽃길 가득한 2023년 첫 걸음마는 안타깝게도 이미 가시밭길로 깔려버린 뒤였다. 2023년도 첫 CT 검사에서 오른쪽 폐 끝에 조그마한 병변이 발견되었다. 매우 작은 크기였지만 지난 CT 영상에선 발견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다시 3개월 뒤의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결국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기대했던 6개월은 다시 3개월이 되었다.


"워낙에 폐나 간으로 원격 전이가 잘되는 암이에요. 그래도 이 정도면 빠르게 자라는 편은 아닙니다."


'재발'이나 '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또 한 번의 세상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드라마 속 비운의 주인공처럼 머릿속에서는 천둥이 내리치고 진료실 문고리를 잡으며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 그러다 초점 없는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게 될 줄 알았는데 교수님의 온화한 말투로 전달된 재발은 그런 상황까지 초래하지는 않았다. 교수님은 복잡한 모니터 화면에서 생전 처음 보는 영어 단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이 의심 소견'


[교수님 만났어? 뭐래?]

[뭐라 그러 긴 아무 이상 없다 그러지]

[잘했어! 좋은 소식~]

[근데 내가 나이가 젊고 이게 재발이 잘 되는 암이라서 6개월 말고 다시 3개월 뒤에 보자네?]

[그래, 1년 무사통과 축하파티 하자]


가족 카톡방에는 제법 그럴싸한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아직 전이 확정은 아니니 다음 CT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처음으로 숨 막히는 일주일이 아닌 숨 막히는 3개월이 시작되었다.




4월 말. 또다시 CT 검사일이 돌아오기까지 3개월 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1년 넘게 담도에 꽂혀 있던 스탠트는 성공적으로 제거되어 드디어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전이 의심 소견'을 받고는 내 인생이 앞으로는 하향곡선만 탈 것 같아 두 달간의 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내 인생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 떠난, 이별 여행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가고 싶은 곳 가며 여한 없는 3개월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검사 결과를 앞두고는 또다시 불안해졌다.


"교수님 저 사실 교수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여행 다녀왔습니다."

"네, 안 그래도 난리가 났습니다."


교수님의 온화한 말투와 동시에 나를 향해 살짝 돌려진 모니터 속에는 [엠폭스 발생 국가 방문 환자], [코로나 발생 국가 방문 환자] 등 빼곡히 적힌 메시지 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천공항을 드나들면서 출입국 기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수님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역시 우리나라 비밀 없는 나라. 교수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오히려 "살이 많이 빠졌네요. 다이어트하고 있나요? 얼굴이 더 좋아졌어요."라며 안부를 물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요?"

"조금 커졌네요."


3개월 전 검사 사진을 나란히 두고 보니 오른쪽 폐에 발견된 하얀 점은 미미하지만 육안으로 비교가 가능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CT 영상이라는 게 3mm 단위로 단면이 나오기 때문에 결과로만 봐서는 종양이 커진 건지, 아니면 이번에 유독 큰 부분만 단면으로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PET-CT검사를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흉부외과 외래 잡아드릴 테니까 교수님도 한번 뵈면 좋을 것 같네요."




"지금으로 봐서는 전이가 확실하다 보이고 게 중 다행인 것은 종양 위치가 오른쪽 폐 끝부분이기 때문에 수술은 수월하겠네요. 흉강경으로도 가능합니다. 6월에 수술 날짜 잡죠."


흉부외과 외래에서 흉강경 수술이 결정되었다. 진료실을 나가는 길에 간호사를 통해 흉강경 수술 안내문이 전달되었다. 가족들은 아직 폐에 전이 소견이 있는 것도 모르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결과 뭐래?]

동생에게서 카톡이 왔다.


[이상 없다 그러지 당연히]

[거짓말하는 거 아님?]

[아닌데ㅡㅡ]


밥 먹으러 간다는 핑계로 카톡 대화를 대충 끊고는 병원 로비로 내려와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북받침 없는 눈물이 끊임없이 마스크로 스몄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 얼굴과 손에 들린 입원 안내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 번 무너졌다가 이제 겨우 일어서려는 우리 가족을 다시 내 입으로 무너뜨려야 한다는 현실이 가혹했다.


내일은 동생의 상견례가 있는 날이었다. 부모님 생전 처음 있는 가족 행사에 뭘 입고 가야 좋을지, 머리와 얼굴 단장은 어디서 해야 좋을지 며칠 전부터 설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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