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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랑 Feb 25. 2024

수평선을 보았다면 마음이 후련했을까

포항 영일대 해수욕장

"언니는 이맘 때 되면 꼭 바다 보고 싶다고 하더라?"

"그랬나?"


꼭 눈앞에 바다를 봐야만 답답한 속이 조금 후련해지는 그런 날이 있다. CT 검사와 결과가 나오는 그 숨 막히는 기간엔 항상 바다를 찾았는데 그럴 때마다 동생은 저렇게 말하곤 했다. 2023년의 첫 CT 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누웠다. 벌써 네 번째 CT 검사지만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이번 CT 검사만 통과되면 3개월에서 6개월로 검사 주기가 늘어나게 된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재발률을 줄이고 완치율을 높여가는 것이다. 1년의 무사통과를 앞두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조금 전까지 조영제를 열심히 삼킨 손목의 주사 자리가 얼얼했다. 분홍색의 어피치 밴드를 붙여놓고 그냥 긁힌 상처라며 자기 최면을 걸어봐도 마음이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분홍색 밴드를 힐끔거리며 운전해서 도착한 곳은 포항이었다. 불과 3주 전 일출 여행으로 경주까지 내려온 김에 잠시 둘러보던 포항이었지만 해맞이 인파에 옴짝달싹 못하고 그만 구룡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포항까지 운전하는 네 시간 동안은 한숨만 가득했다. 텅 빈 고속도로, 단 한 곡도 마음에 들지 않는 플레이리스트, 저들끼리 신난 라디오, 분위기 파악 못하는 분홍색 밴드까지 하나같이 신경질이 났다. 무려 네 시간의 한숨으로 탁해진 차를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 앞에 주차를 한 뒤 버스를 타고 영일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동해 밤바다의 찬 바람을 쐬고 나니 그제야 조금 후련해지는 듯했다.


단단한 모래를 밟으며 천천히 걷다가 영일교에서 영일정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야경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옷소매로 카메라를 박박 문질러 닦은 후 야경을 핸드폰에 열심히 담았다. 블로그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멋있었다. 이 야경 하나로 네 시간 운전의 보상을 모두 받은 것 같았다. 어떻게 찍어야 색감이 더 예쁘게 나올까, 어느 구도가 좋을까 고민하며 영일교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사진을 찍는 동안에는 슬픈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일교를 걸어 영일정에 올라서니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횟집 건물들이 더욱 화려한 야경을 뽐내고 있었다. 불빛은 횟집 건물에서 끝나지 않고 바다 위까지 이어졌다. 바다를 둘러싸는 영일만이 수평선을 가로막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겨울밤바다의 까만 수평선이었건만. 잠시 잊고 있던 답답함이 다시 밀려오며 영일만이 야속해졌다.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도 모를 새까만 풍경을 봤어도 답답했을걸 알면서도 원망스러웠다. 그냥 뭐든 다 탓하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탓할 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영일대 해수욕장까지 버스 타고 왔던 길을 게하로 돌아갈 땐 걸어서 갔다. 영일정의 화려함을 두 눈과 사진으로 가득 담고 다시 해수욕장의 단단한 모래를 밟으며 게스트 하우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일만에 가로막혀 모래사장에는 파도가 일지 않았다. 야경만 화려할 뿐 고요한 해수욕장 한복판에 서서 혼을 쏙 빼놓을 정신없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어디선가 하얀 강아지가 재빠르게 뛰어오더니 마치 오랜만에 절친을 만난냥 앞 발로는 내 허벅지를 박박 긁고 뒷 발로는 신나게 콩콩 뛴다.


뒤이어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온 아주머니가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했지만 마침 필요했던 순간에 혼을 쏙 빼놓고 간 하얀 강아지가 오히려 고마웠다. 강아지를 들쳐 매고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 호통치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게스트 하우스 쪽으로 걸었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일 뿐인데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었다. 고요하다 못해 으슥했던 포항의 어느 거리에서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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