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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랑 Feb 25. 2024

조금 특별한 생일 여행

후쿠오카

유독 더웠던 2022년 여름은 갱년기 열감으로 나에겐 유독x2 덥고 힘들었다. 하루에 두피가 쏟아내는 땀이 그렇게 엄청난지는 삭발 전엔 알지 못했다. 그 많은 땀을 머리카락이 다 흡수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다시 머리가 자라면 떡진 것 같지 않아도 매일매일 감아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여름에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또 친척들과 만나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선선한 가을이 되어서는 동네 뒷산에 오르며 다리에 힘을 길렀다. 산에 오르는 족족 부쩍부쩍 올라와주는 체력에 감사했다.


벌써 11월이 되었다. 항암 치료가 끝나면 꼭 하고 싶은 일을 정리한 목록에 거의 다 체크가 되어 있었다. 머리 기르기, 생선회 먹기, 바다 수영하기, 등산하기 등등. 다사다난했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맞이한 내 생일은 좀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다.


여행을 가고 싶을 때면 스카이스캐너에서 항공권을 훑어보는 게 어느새 소소한 취미가 되었다. 아이쇼핑 하듯 여행지와 경유지 등 비행기 노선을 보면 괜히 설렜다. 생일 언저리 날짜에 장소를 '어디든지(Everywhere)'로 설정해 놓고 가장 저렴한 노선을 찾았더니 20만 원 초반의 후쿠오카 여행이 검색된다. 고민 없이 바로 예매했다.




후쿠오카는 5년 전에 이미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엄청나게 대단한 관광지가 있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한적한 시골 마을인지라 일본 특유의 낡고 아기자기한 감성을 잘 담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후쿠오카'보다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이라는 점이었다. 3년 만에 찾은 인천공항은 여전히 설렜다. 탑승동에서 비행기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3년 사이에 낯설어진 비행기는 조금이라도 흔들릴 때마다 멘붕을 초래했다. 고작 한 시간 반 거리였지만 빨리 비행기가 땅에 닿았으면 했다. 후쿠오카 공항이 발 밑으로 보일 때쯤 무사히 착륙하는가 싶더니 비행기는 다시 강하게 하늘로 솟구쳤다. 기내가 술렁거렸다.


[우리 비행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착륙을 하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다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국경 넘는 것이 꽤나 예민해졌다더니 이게 말로만 듣던 혐한이라는 건가. 머릿속에서 온갖 소설이 펼쳐지려 할 때 강풍으로 인한 고어라운드(Go-around:항공기가 착륙할 때 관제탑으로부터의 지시, 기상 불량, 진입 고도 불량 등의 이유로 착륙을 단념하고 재차 상승하여 착륙을 다시 시도하는 것)였다는 것을 알리는 기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 10여분 간 상공을 뱅뱅 돌던 비행기는 재시도에서 안전하게 착륙했다. 한때 13시간 비행에도 꿋꿋했던 내가 후쿠오카 땅을 밟고는 기쁨의 박수를 친 건 지금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후쿠오카에 더 둘러볼 곳은 없었다. 굳이 관광 명소 주변에 비싼 가격으로 숙소를 잡을 필요가 없어서 3박에 10만 원짜리 에어비앤비를 잡았다. 지하철 역까지 1.2km 거리를 매일 걸어 다니기는 너무 힘들었다. 저렴한 숙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후쿠오카에 머물렀던 3박 4일간 나의 주요 일정은 등산이었다. 후쿠오카에 도착한 첫날에는 숙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서 나카스 중앙역에 짐을 맡겨놓고 버스로 40분을 달려 '시모바루'에 도착했다.


다치바나산은 해발 367m로 평소에 다니던 동네 뒷산과 그 높이가 비슷했지만 올라가는 데만 40분이 걸렸다. 평일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엔 단 한 명의 등산객도 볼 수 없었는데 정상에 오르자마자 어디로 올라왔는지 모를 등산객이 서너 명 보였다. 다치바나산 정상은 헬기장으로 사용해도 될 만큼 드넓었고 발 밑으로는 평평한 후쿠오카 시내와 바다가 펼쳐졌다. 다치바나산은 그저 몸풀기였는데 금액만 보고 잡았던 숙소의 자비 없는 위치 때문에 첫날에만 20,000보를 넘게 걸어버렸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몸이 찌뿌둥한 게 컨디션이 영 좋지 못했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 '다자이후'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의 성지인 '카마도 신사'에서 시작하는 '호만산' 등산이었다.


11월이었지만 이제 막 여름이 물러간 듯 포근했던 후쿠오카의 날씨는,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기도 전에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어던지게 했다. 우리나라 국립공원급으로 유명한 등산 코스였는지 평일이었는데도 등산객들이 많았다. 단차가 높은 돌계단을 끝없이 오르다 잠시 멈춰 한숨 고르는데 지나가는 등산객들마다 '쫌만 더 가면 돼', '다 왔어'라고 한다. 저 두 마디는 만국공용 등산용어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쫌만 더 가면 돼.'로부터 정확히 40분 후 호만산 정상에 도착했다. 해발 829m 한 시간 반동안 포기하지 않고 올라온 보람을 안겨주는 풍경이 펼쳐졌다. 누가 봐도 일본 스러운 신사 건물과 커다란 바위들로 둘러싸인 정상,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연신 '카와이'를 외치는 학생들 그리고 가방에서 꺼낸 명란 삼각김밥까지 완벽하게 일본 여행 중이었다. 요즘은 제주도보다 가기 쉬운 일본이었지만 나름 해외여행인데 등산으로만 일정을 채우니 그것대로 특별한 맛이 있었다.




너무 등산만 했다가는 좀 아쉬울 것 같아서 마지막 하루는 일일투어를 신청했다. 호만산 가는 길에 잠깐 들렀던 다자이후부터 유후인, 벳부까지. 나와 같이 혼자 떠나 온 여행객들과 삼삼오오 모여 함께 놀기도 했다. 일일투어 일정이 끝나고 한국에 가기 전 기념품 쇼핑을 했다. 지금은 한국에 널리고 널린 '아사히 생맥주캔'을 찾기 위해 편의점을 세 곳이나 찾아다녔다. 마지막 체력까지 쥐어 짜내어 맥주를 구하는 데 성공하고 결국 3박 4일간 총 55km 80,000보를 기록했다.


퉁퉁 부은 다리와 등산 풍경 사진 몇 장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탑승이 완료되고 출발시간이 지났는데도 비행기는 꼼짝하지 않는다. 10여 분이 지나 시작되는 기내 방송.


[오늘은 2022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입니다. 영어 듣기 평가가 진행되는 00시 00분까지는 비행이 금지되어 있어 우리 비행기는 00시에 출발할 예정이오니 승객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비행기는 40분간 활주로에서 대기 후 이륙할 수 있었다. 갈 때는 고어라운드, 올 때는 수능 듣기 평가로 활주로 대기. 고작 한 시간 반 거리에 가는 길 오는 길 모두 이런 에피소드가 끼어들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니 30여 년의 긴 시간 사이에 '암'을 주제로 하는 에피소드가 껴드는 건 응당 그럴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편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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