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
"나 주말에 경기도 올라가는데 간 김에 너 보고 와야겠다."
"경기도? 왜?"
"아는 사람 결혼식 있어서"
"어디에서 하는데?"
"위례 쪽이라고 하던데"
"거기서 여기까지 한 시간 반은 걸릴 텐데..."
"경기도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었어?"
서천에서 살고 있는 대학 친구 DJ에게서 오랜만에 카톡이 왔다.(실명 밝히기 부끄러워하는 그녀가 직접 정해준 닉네임) 카톡이 있고 며칠 뒤 DJ의 가족이 여주로 찾아왔다. 5월이었지만 봄바람이 꽤나 쌀쌀하였다. DJ는 같은 과 선배와 결혼을 해서 4살 된 귀여운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DJ의 남편은 곧 나의 대학선배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DJ 부부를 우리 동네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준 친구 가족에게 고마웠다.
"네가 DJ 딸내미였구나."
드디어 만나보는 DJ 딸내미에게 미리 사둔 공주 머리띠를 내밀었다. 포장을 뜯고 여기저기 훑어보더니 이내 곧 아빠 머리에 머리띠를 씌운다. 네 취향을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이모가 미안하다.
친구 가족과 여주 쌀밥 한정식도 먹고 예쁜 카페에서 근황 토크도 하고 강변 유원지 산책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항암이 끝나고 컨디션이 회복되면 놀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갯벌에서 바지락 캐서 직접 반죽한 면으로 칼국수를 해 먹는 게 우리의 미션이었다. 설레는 여름휴가를 기대하며 남은 항암 일정이 하루빨리 지나가길 기다렸다.
7월 말, 항암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드디어 DJ와 약속한 미션을 수행하러 가는 날이 되었다. 서천까지는 3시간을 꼬박 운전해서 겨우 도착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방울토마토를 주전부리 삼아 지루함 없이 운전했다. 한적한 시골에 위치한 DJ의 집은 정돈이 잘 되어있는 전원주택이었다. 방학을 맞이하여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간 초등학생 마냥 신이 났다.
친구 부부가 운영하는 농장 곳곳엔 그들을 닮은 소박함이 담겨 있었다. 단단하게 잘 영근 단호박을 제 주인에게 안전히 전달될 수 있도록 포장을 하고 농장 주변으로 어지러운 잡초를 대충 치워냈다. 농장을 시작으로 서천의 명소를 구석구석 탐방했다. 내리쬐는 불볕더위에 맞서 열심히 동백정에 올랐다. 드넓은 바다와 소나무 숲이 만나 시원한 바람을 이루었다. 모자를 벗고 두피의 땀을 식히려니 딸내미가 내 눈을 쳐다보며 "이모가 어디 갔지?"하고 묻는 게 귀엽다.
서해의 명물 낙지볶음으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고 춘장대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했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동해 바다와는 달리 미지근한 서해 바다는 바로 뛰어들기에도 좋았다. 아무리 들어가도 무릎 언저리에서 맴도는 얕은 수심이었지만 튜브를 타고 놀았다. DJ 가족과 물놀이에 여념이 없을 무렵, 역시 대학 친구인 밍과 양파가 합류했다.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모두 만나니 대학 시절 MT의 추억이 생각났다.
저녁에는 다 함께 소황사구에서 서해 일몰을 구경했다. 삽교 일몰에 이어 기가 막힌 일몰 장관을 보여주는 서해가 고마웠다. 연신 '우와, 행복해'만 반복했다. 한여름 풀밭길에 지독한 모기가 다리를 뜯어도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해가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화려했던 일몰쇼가 끝나자 우리는 마트에서 바비큐 파티 거리를 구입했다. 숯불의 빛을 보고 달려드는 벌레와 함께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수백 번을 반복해도 웃긴 대학 생활 에피소드에 다 같이 자지러졌다.
갯벌에서 캔 바지락과 직접 치댄 반죽으로 만든 칼국수는 35도를 웃도는 불볕더위에 그만 파투가 났다. 그 대신 홍원항을 찾았다. 서해지만 365일 물이 차있다는 홍원항의 바다는 아름다운 파란빛이었다. 서해는 다 흙탕물같이 걸쭉한 줄만 알았는데 그토록 파랗고 싱그러운 바다는 처음이었다. 아침 조업을 마치고 항구에 줄줄이 서있는 알록달록한 배들로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1박 2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비해 너무 많은 행복을 담았던 여행이었다. 아름다운 서천의 풍경과 맛있는 먹거리 그 자체로도 좋았지만 변해버린 내 모습에도 변함없이 대해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성심당 부추빵 하나 사달라는 말에 튀김소보로와 부추빵 세트로 사다 준 밍이도, 신생아 모발을 위해 한방 샴푸를 한가득 가져다준 양파도, 그리고 금이야 옥이야 직접 기른 단호박을 아낌없이 담아준 친구 부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