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3호선(청와대, 북촌 한옥마을, 송해길)
5,800원이었는데 어느새 6,500원으로 올라있던 '서울 경부'가 적힌 버스티켓은 예전처럼 한 귀퉁이를 북 찢어 기사님이 가져가는 일도 없었다. 차가 생긴 후로 항상 운전해서 돌아다녔던 터라 몇 년 만에 타보는 고속버스인지 모르겠다.
미리 신청해 놨던 청와대 관람 날짜가 벌써 코앞으로 다가왔다. 막상 날짜가 되자 엄마는 복잡한 서울로 가는 게 귀찮았는지 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 혼자 가겠다는 말에 엄마는 다시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엄마가 가면 난 가지 않을 거라며 기싸움을 했다. 엄마도 나도 서로에게서 벗어나 한숨 돌리는 순간이 필요했다.
날이 제법 더워졌다. 구멍이 숭숭 뚫려 통풍이 잘 되는 모자를 쓰고 박시한 반팔 소매로 팔뚝에 달려있는 PICC 줄을 숨겼다. 5차 항암을 마치고 6차 항암만을 남겨두었을 무렵, 더 이상 고열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은 없었지만 독한 약에 수시로 절여지며 많이 지쳤는지 입술은 헤르페스 물집을 떼어내지 못했고 눈 밑엔 다크서클과 주근깨가 가득했다. 변해버린 겉모습만큼 마음도 많이 위축되었다. 최근에 해본 MBTI 검사에서 처음으로 I 수치가 E를 훨씬 뛰어넘었다. 집 앞에 마트를 나가도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두려웠고 모르는 사람들을 지나쳐도 그들이 보내오는 눈빛이 싫었다. 아무 의미 없이 쳐다보는 눈길도 싫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고 안쓰럽게 보는 것 같았다.
복잡한 출근 시간을 피해 아주 이른 아침에 출발을 했는데 서울 지옥철은 러시아워라는 게 따로 없나 보다. 이미 플랫폼을 가득 채운 인파에 주눅이 들어버렸다. 일렬로 서서 철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피해 음료수 자판기와 벤치 사이 구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대화행 3호선 열차가 들어오고 줄 서있는 사람들을 뒤따라 열차에 올라탔다. 어중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오른쪽 소매를 당겨 다시 한번 PICC를 숨겼다. 긴장한 탓인지 더운 날씨 탓인지 모자 속으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티 나지 않게 눈을 굴려 여기저기 눈치를 보았다. 모두 하나같이 부족한 잠을 자거나 스마트폰 화면에만 집중할 뿐, 그 많은 사람 중 단 한 명과도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동물원 원숭이처럼 나를 훑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출입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베이지색 모자를 쓴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음 역에서 머리를 새파랗게 물들인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 역시 오직 한 명의 눈길만 받았을 뿐이다. 바로 나.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저마다의 세상에 빠져있는 서울 사람들이 왜 그리도 고맙던지. 각자 뚫어져라 쳐다보는 스마트폰을 뺏어 들고 두 손을 덥석 잡아 고맙다고 마구 흔들고 싶었다.
평일 오전에도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영빈관 입장까지는 이미 한 시간 이상의 대기가 필요했다. 과감히 포기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TV에서 봤던 청와대 지붕은 아까 지하철에서 봤던 사람 머리처럼 새파란 색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빛바랜 청록색이었고 그마저도 군데군데가 벗겨져있었다. 생각보다 초라했다. 대통령 집무실과 인왕실에서 대통령 같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대통령 집무실보다 영부인 집무실이 더 예뻤다. 그나저나 영부인도 집무실이 있었구나.
대통령이 생활하던 관저는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했다. 더운 날씨에 신생아 체력으로 관저까지 올라가는 건 고난이었다. 관저에서 집무실까지 걷는 것만으로도 체력소모가 상당했는데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난 이유로 충분하다는 실없는 생각도 했다.
춘추관 쪽 후문엔 쉼터가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중 비어있는 분홍색 텐트에 들어가 손선풍기를 쐬며 맛집을 검색했다. 이제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대부분 11시부터 영업하는 밥집뿐이었다. 후문으로 빠져나와 북촌 한옥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한동안 한옥마을의 고즈넉한 매력에 빠져 주말마다 드나들던 때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와본 한옥마을은 여전히 고즈넉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지나가다 일본풍으로 지어진 카페가 눈길을 끌었는데 이제 막 오픈을 한 듯 보였다. 마침 배도 고프겠다 카페로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시그니처 메뉴였던 티라미수를 주문했다. 오전에만 이미 10,000보를 걸어 바닥난 체력에 달달한 티라미수 한 입은 훌륭한 영양제가 돼주었다.
돌아가는 버스표를 끊고 다시 고속터미널로 향하는데 이대로 가기는 아쉬워 종로 3가에 들렀다. 엊그제 송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5번 출구로 나오자 근조화환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길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그리워했다. 나 역시 그 사람들 사이에서 동상을 바라보았다. 100세가 넘어서도 전국노래자랑을 책임질 것만 같던 송해 할아버지의 별세 소식에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60세 언저리에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여유로운 노년의 생활을 즐기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인데 90세가 넘어서까지 본업을 이어간다는 건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부와 명예, 장수까지 누린 국민 MC는 어제부로 '고인'이 되었다. 허무했다. 고인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것일까. 열심히 살고 있지 않았지만 더욱더 열심히 살고 싶지 않았다. 고인은 지금 온 국민이 본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걸 알기는 할까.
동상 속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워하던 인생의 동반자 곁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계실 것이다. "편히 쉬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그래도 저는 할아버지가 부러워요."라고 인사를 건넨 뒤 고작 반나절의 서울 나들이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