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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랑 Feb 25. 2024

정신과에 다니기 싫어서 바다를 찾았다

세상으로 나오는 연습

시간은 2022년 1월 14일에서 멈췄다. 세상이 통째로 멈췄다 생각했는데 나의 시간만 멈춰있을 뿐 모두가 분주한 삶을 살고 있었다. 월요일만 되면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었다. 주말 내내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 월요일이 되면 각자의 삶으로 복귀했다.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암 환자 백수에게도 다른 의미의 월요병이 찾아왔다.


'암밍아웃'을 한 이후로 혼자 남겨진 기분은 더해갔다. 나의 잠수가 길어지자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차마 어떤 말로 다가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건강하던 애가 하루아침에 암 환자가 되었다고 하면 나 역시도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 우울감에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면서 세상과 나를 더욱 철저히 차단했다. 그러다 항암이 결정되고부터는 조금씩 암 환자의 현실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당장 내일 삶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항암 치료로 재발률을 낮출 수 있다고 하니 희망을 갖고 열심히 치료에 임하기로 했다. 언제까지고 2022년 1월 14일을 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오늘 날씨 좋다. 밥 먹으러 가자~]


삭제된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잠잠하던 카카오톡 알림이 오랜만에 울렸다. 친구 신신의 연락이었다. 고립생활이 한창이던 어느 날 뜬금없이 날씨가 좋다며 밥을 먹자는 그 메시지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모자로 민머리를 덮고 파운데이션으로 노란 얼굴을 가렸다. 없는 눈썹을 펜슬로 삐뚤빼뚤 그려도 보았다. 얼마 만에 밥약속인지 모르겠다. 식당에 먼저 도착해서 초조하게 신신을 기다렸다. 내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될까 긴장이 되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식당 문을 열고 신신이 들어왔다. 특유의 하이톤으로 "랑이이이!"를 외치며 들어오는 신신에게서 조금의 당황스러움도, 놀람도, 슬픔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바쁜 일상 속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게 어찌나 고맙던지.


"야, 우리 이런 거 사 먹는 거 보니까 나이가 들긴 했나 봐. “


맑은 대구탕을 열심히 퍼먹으며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이제 그만 헤어지는가 싶었는데 신신은 나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오후 반차를 썼다고 한다. 신신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처음 가보는 한적한 카페에 앉아 가장 간결해 보이는 디저트를 주문했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와 단호박 케이크. 세련된 카페 내부 이곳저곳에서 사진도 찍고 그간 쌓여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카페에 온 지 두 시간 만에 결국엔 체력이 떨어져서 잠든 채로 신신의 차에 실려와야 했지만 그날을 계기로 세상에 대한 마음이 활짝 열렸던 것 같다. 세상이 나를 고립시키고 내 삶이 송두리째 망가졌다 생각했는데 신신과의 짧은 데이트가 평범했던 예전의 일상을 떠오르게 했다. 지금의 내 모습도 변함없이 대해주고 내가 슬퍼하는 동안 나의 세상을 지켜주고 있던 신신이 고마웠다.




항암치료가 끝나고 루프린 주사를 더 이상 맞지 않아도 되었지만 잠들어있던 난소가 깨어나는 데는 그로부터 3개월이나 더 지나야 했다. 끊겼던 생리가 다시 시작되고 밤마다 잠을 방해하던 몸의 열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항암제의 약기운이 사라지면서 머리도 삐죽삐죽 자라나고 나무토막 같던 손톱과 눈 밑의 다크서클에도 제법 혈색이 돌았지만 마음에 쌓인 독소는 빠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컨디션 어때?”로 시작하는 하루는, 암 환자에서 벗어나 비로소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보려는 내 의지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아침마다 보호받고 보살핌 받아야 하는 환자였다. 3개월마다 가슴 졸이며 CT 사진에 아무런 이상이 없기를 바라는 것도 숨이 막혔다. 때마다 밥을 챙겨 먹고 잠을 자고 간혹 걷는 게 전부인 헐렁한 일상의 틈사이로 불안함이 다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집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 세상이었던 차 안에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운전을 하면 잠시나마 우울함이 잊히곤 했다. 항암 부작용으로 머리가 숭숭 빠졌을 때 백사장에서 펑펑 울었던 해소법이 효과가 좋았는지 조금이라도 답답하면 바로 운전대를 잡고 바다로 향했다. 특히 CT 검사를 하고 결과가 나오는 일주일 사이에는 무조건 떠났다.


CT 결과 외래는 항상 엄마와 함께 갔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도 싫었다. 떨리고 긴장되는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내 긴장조차 다스리기 힘들어 옆에서 초주검 된 얼굴의 엄마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는 교수님에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하소연했는데 "얘가 너무 예민해요."라는 말이 결국 불씨가 되었다. 교수님이 정신과 협진을 요청하겠다 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라고 말하고는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그 이후로 병원은 혼자 다녔다.


바다를 보면서 천천히 걸으면 마음이 제법 시원해졌다.  끝도 없이 새까만 바다가 내 인생처럼 막막하게 느껴질 땐 섬으로 뒤덮인 바다를 찾곤 했다. 이른 아침의 동해 일출이 버거우면 여유로운 오후의 서해 일몰을 즐겼다. 여러 가지 모양의 바다는 각자 다른 방법으로 위로가 되었다. '컨디션 어때?'가 아닌 '오늘도 나를 찾아온걸 보니 컨디션이 좋은가 보네.'라며 반겨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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