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 삽교
총 여섯 번의 항암 치료가 끝난 후 첫 가족여행이었다. 올해 음력 6월 4일을 계산해 보니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릴 7월 초였다. 엄마 아빠의 생일이 다가오면 우리 가족은 여행 계획부터 세운다. 작년 9월 아빠의 생일을 맞이하여 설악산 자락에서 글램핑을 했는데 엄마는 그 기억이 그렇게도 좋았나 보다. 올해는 나의 항암 종료 축하 겸 엄마 생일파티 여행으로 바닷가에 위치한 캠핑장을 찾았다. 벌써부터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로 경치 좋은 바닷가 숙소를 구하기 어려웠다. 동해 쪽은 포기한 지 오래고 서해에 그나마 예약 가능한 숙소가 몇 개 있어 4인용 카라반을 예약했다.
우리 동네는 강원도와 가까웠기 때문에 여름이면 선택의 여지없이 동해바다로 휴가를 떠나곤 했다. 가족끼리 서해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충남 당진에 위치한 삽교호까지는 고작 한 시간 반 거리였다. 서해라고 다 멀기만 한 동네가 아니었다.
삽교호 관광지에 도착해서 진천에서 출발한 동생과 합류했다. 날씨가 어찌나 더운지 동생이 진천에서 사 온 생크림 케이크는 에어컨 빵빵한 차 안에서도 처참히 가라앉았다. 말로만 듣던 핫플레이스인 삽교를 이제야 오게 되었다. 관광지 주차장 규모만 봐도 이곳이 얼마나 인기 있는 여행지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삽교호를 대충 한 바퀴 둘러본 후 왜목마을 해수욕장 바로 앞에 위치한 횟집으로 들어갔다. 점심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식당에는 우리 가족뿐이었다. 4인 코스를 주문해 놓고 밑반찬만으로 이미 풍족한 상에 바쁘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항암치료가 이제 막 끝났기 때문에 날 음식을 먹지 못하는 나는 해물 칼국수를 따로 시켰다. 싱싱한 해산물과 회를 보고 있자니 아무리 맛있는 칼국수를 씹어도 만족이 되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회를 딱 한 점만 먹어보려다 결국 칼국수 그릇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왜목마을 해수욕장을 한 바퀴 걸었다. 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바닷물은 온데간데없었다. 매끄럽게 드러난 뻘과 돌멩이가 전부였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찐득한 갯벌을 보고 있으니 불쾌감이 절로 드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갯벌에 와본 김에 바다 생물이나 구경할 생각으로 백사장을 지나 뻘로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백사장에서 뻘로 바뀌는 순간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불쾌함은 곧 상쾌함으로 변했다. 핸드폰을 꺼내 들어 뻘 사진도 찍고 동생과 서로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입실 시간이 되어서 예약해 놓은 카라반으로 향했다. 바닷가인줄 알았는데 논두렁 위에 몇 대 서있는 카라반이 전부였다. 바다를 보려면 카라반에서 15분은 걸어 나가야 했다. 속은 기분이지만 카라반에서 바다가 보이지 않을 뿐 바닷가에 위치한 건 맞았기 때문에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막 새 단장을 마친 낡은 카라반 안에 짐을 풀고 여행 전 아웃렛에서 행사가로 구매한 반팔티를 서프라이즈로 꺼냈다. 한 번쯤은 가족티를 맞춰 입고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을 쨍한 빨간색의 반팔이었지만 다 같이 맞춰 입으니 화사하고 예뻤다. 이 여름의 강렬함을 가뿐하게 이겨버릴 것 같은 빨강 군단이었다.
난생처음 캠핑카 숙박이 신기해서 구석구석 둘러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캠핑장 뒤에 있는 언덕에 자리를 깔고 앉아 바람에 더위도 식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캠핑장 사장님에게 부탁해서 이른 바비큐 파티를 했다. 소갈빗살, 양갈비, 민물장어 등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종목(?)으로 목구멍까지 꽉꽉 채워가며 맛있게 먹었다. 하루 종일 불볕더위의 차 안에서 폭삭 주저앉아버린 생크림 케이크를 꺼내 들어 엄마의 생일 축하 파티를 했다. 맛있는 안주에 술로 한껏 얼큰해진 분위기가 꽤 낭만적이었다. 'HAPPY BIRTH DAY'가 쓰여있는 우스꽝스런 선글라스를 엄마에게 씌웠다. 엄마 아빠가 큰 소리로 행복하게 웃었다. 집에 암 환자가 생긴 지 1년 반 만에 보는 부모님의 환한 미소였다. 뭐 얼마나 대단한 여행이라고 이 웃음을 찾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일까.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어느새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서해의 일몰은 화려하고 멋있었다. 동해 바다에서 보던 일출과는 또 다른 매력이지만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일몰이었다. '불타오를듯한'이란 수식어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잠시 파티를 멈추고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 모두 저 일몰처럼 사라지는 순간까지 예쁨만 간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