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간절곶
이튿날 포항은 맑고 따뜻했다. 열심히 챙겨 봤던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촬영지를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얼마나 포근한 날씨였으면 '사방기념공원'에서는 개나리가 군데군데 피어있었다. 촬영지를 찾아다닐 때마다 드라마 속 장면이 절로 떠오르며 나 역시 '공진마을'의 주민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양심은 있어서 신민아가 된 기분이라고 못하겠다.) 포항은 어딜 가도 드라마 분위기처럼 포근하고 아기자기하게 느껴졌다.
포항의 랜드마크인 호미곶까지 둘러본 후 다시 구룡포로 내려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여행을 마치고 집을 가자니 겨우 해소된 우울한 감정이 다시 올라올 것 같고 다른 곳을 여행하자니 딱히 계획이 없다. 예전부터 가고 싶던 거제도까지의 거리를 찍어보니 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같은 경상도라고 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지도 어플을 켜놓고 구룡포항에서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손가락을 내렸다. 새해 일출에 실패한 문무대왕릉을 다시 도전해 볼까. 아니야, 문무대왕릉 하나 때문에 다시 경주를 가고 싶진 않아. 그렇다면... 여기다.
간절곶에 도착하니 오후 다섯 시가 지나고 있었다. 얼마 전 이곳도 새해 일출 맞이 인파로 미어터졌을 이곳은 지금 나 혼자뿐이다. 맑고 따뜻했던 포항과는 달리 간절곶은 흐리고 쌀쌀했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나무 데크길을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펜스에는 잔잔한 문구가 붙어 있었다.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 네가 어떻게 알아? 간절히 바라서 이루어지면 우리나라 사람들 다 로또 당첨자게? 괜히 심술이 터져 나무 펜스와 실랑이를 했다. 그래도 간절곶에 왔으니 속는 셈 치고 간절하게 소원은 한 번 빌어볼까. 일출 명소로 유명한 간절곶에서 비는 소원은 뭔가 당첨률(?)이 더 좋지 않을까. 내일 아침 일출에 소원을 담아보기로 했다.
찾는 사람이 없어 더 쓸쓸한 간절곶은 어제오늘 열심히 돌아다닌 포항의 명소를 다 합친 것보다 더 좋았다.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이고 잔잔한 느낌이 들었고 그나마 하나 서있던 커다란 우체통마저 어디론가 치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단순했다.
영일만에 가로막힌 답답한 바다가 아닌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이 보인다. 확실히 어제보다 훨씬 마음이 가벼웠지만 그게 탁 트인 수평선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하루 열심히 돌아다니며 환기를 시킨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해가 저물고 제법 어둠이 깔릴 때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면서 난간에 붙어있는 문구들을 내 방식대로 바꾸어 보았다.
[익숙해질 때까지 그냥 견뎌.]
[지금 슬퍼하면 그냥 슬픈 날이 하루 더 늘어날 뿐이야.]
[오늘보다 더 좋은 날은 없어.]
어째 더 우울해지는 것 같다.
겨울 일출이 보기 좋은 이유는 해 뜨는 시간까지 충분히 자고 나와도 되기 때문이다. 마침 간절곶 입구에 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4인실을 혼자 전세 내듯 편한 밤을 보내고 일출 시간에 맞춰 다시 간절곶으로 나왔다. 일출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동이 트고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어제만큼이나 맑은 날씨라는 걸 미리 알려주기라도 하듯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새빨간 해가 떠오른다. 한낮에는 해가 어느 방향과 속도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는데 일출을 보면 해가 굉장히 빨리 움직인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제 막 고개를 내민 것 같은데 해는 어느새 둥실 떠올라 그 넓은 간절곶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어제의 다짐이 아까워지지 않게 재빨리 속으로 빌었다.
‘제발 제 건강 좀 돌려주세요.’
기억에는 없지만 울산에서 나의 첫걸음마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모님의 품에 안겨 왔던 울산의 이름 모를 공원에서 아기 랑랑은 맨발로 흙을 밟았다. 30여 년 전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딛던 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이 이렇게 감회가 새로울 수 없었다. 물론 '암 환자'라는 타이틀이 붙어버린 제2의 인생이지만 30여 년 전 울산에서 처음 뗀 걸음마처럼 오늘 일출을 시작으로 평탄한 꽃길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