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배고파!"
"오~ 진짜?"
"유부초밥 먹고 싶어."
내 입에서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말이 흘러 나오자 마자 엄마는 펄쩍 기뻐하였다. 한 달 만에 만나는 내 차도 무척 반가웠다. 비록 운전석이 아닌 조수석에 앉아 있지만 그마저도 상쾌했다. 차에 타자마자 곧바로 블루투스를 연결하여 노래를 빵빵하게 틀었다.
'꽃가루를 날려, 폭죽을 더 크게 터뜨려'
병원을 나서자마자 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유부초밥 만들어 놔]
그리고는 기쁜 마음을 한가득 담아 셀카를 여러 장 찍어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렸다. 게시물이 올라가기가 무섭게 좋아요와 댓글이 와다다 달렸다. 내 소식을 궁금해하고 걱정하던 사람들이 응원의 댓글을 남겨주었다. 2월 8일, 나의 2022년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퇴원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그간 방치되어 보기 싫게 길어버린 머리를 단발로 똑 자르는 일이었다. 수액을 맞고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어깨너머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귀 밑까지 짧게 잘라버리고 뒷목을 이발기로 위잉 밀어버리니 속이 다 시원했다. 오랜 병원생활로 한껏 떨어져 있던 체력을 올리기 위해 매일 아파트를 몇 바퀴 돌고, 엄마표 보양식으로 열심히 영양보충도 하고 방치되어 있던 내 차도 깨끗히 세차하며 일상의 행복을 차근차근 찾아갔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될 줄 알았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은 일주일도 채 가지 못했다.
'암센터'라는 글자가 파랗게 빛나는 구역으로 들어가는 일은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암센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세상이 무너질 듯 슬퍼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생에 첫 혈액종양내과 외래를 보러 왔다. 시간에 맞춰 내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에게 생년 월일을 말한 뒤 진료실 문을 열었다. 작은 진료실 안에는 나와 같은 단발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인상 좋은 중년 여자 교수님이 앉아 있었다.
인상만큼이나 온화하고 차분한 말투로 교수는 항암 계획에 대해 설명하였다. 2년 전 일이라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서 들었던 얘기를 대충 나열해 보자면
- 수술 후 2주 안에는 항암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담도 문제로 너무 늦어진 감이 있다.
- 수술로 종양은 제거되었지만 재발률이 높은 육종암이기 때문에 예비항암을 해야 한다.
- 나이가 젊어서 공격적인 항암을 할 계획이다.
- 세포독성 항암이라고 해서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1세대 항암제인데 아드리아마이신과 이포스파마이드 두 가지를 쓸 계획이다.
- 입원해서 4일 간 항암치료를 하고 3주 주기로 총 6회 항암을 하게 된다.
- 워낙 독한 항암제라 탈모는 물론 점막이 손상되고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미리미리 부작용 약을 처방할 예정이고 사람마다 부작용 종류와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항암을 하지 않을 시 재발률은 50대 50이라고 볼 수 있다.
혈액종양내과 외래에서 항암 계획을 듣고 돌아오는 길 내내 엄마와 나는 말이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 우리는 거실에 선채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퇴원만 하면 다시 일상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 같아 막막했다. 처음 암 선고를 받았을 때처럼 엄마는 얼마 울지 못하고 "우리 힘내보자?"라며 애써 설움을 눌렀다.
21일 입원까지는 다시 또 일주일이 남았다. 그 시간 동안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가족들과의 시간에만 충실했다. 수술과 입원치료를 하며 제법 살이 빠져서 그런지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는 재미가 있었다. 2월 중순 쌀쌀한 날씨에도 매일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나가서 놀았다. 당남리 섬에서 냉이도 캐고 아웃렛에서 아이쇼핑도 하고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간혹 나오는 답답한 한숨 또한 간간히 뱉어가며 열심히 평범함에 집중했다.
하루는 엄마와 세종대왕릉으로 산책을 나갔다. 수년간 공사를 통해 바뀐 세종대왕릉은 어린 시절에 자주 찾아와 놀곤 했던 그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엔 봉분도 코 앞까지 올라가서 볼 수 있었는데 바뀐 뒤로는 봉분까지 올라가는 길이 꽤나 복잡해졌고 정면이 아닌 측면 먼발치에서 볼 수 있는 게 전부였다. 대충 둘러보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데 빽빽이 서있는 소나무마다 기둥에 노란 영양제를 꽂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 같아."
또 한 번 답답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