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종결에서 아라미스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총사대를 그만둔다고 나와있다. 공주님이라고 불렸던 삼총사의 아라미스. 그의 정체는? 이런 의문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80년대 후반 한일합작 만화 <달타냥과 삼총사>에 아라미스가 여자라는 설정이 나온다. 죽은 약혼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남장을 하고 삼총사가 되는 이야기. 이 설정을 기본으로 이야기를 풀어가 보려 한다.
1. 수도원의 생활
파리 최고의 검객으로, 테크닉으로는 그 누구도 상대하지 못했던 삼총사의 아라미스. 총사대를 그만두고 수녀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왔다.
아라미스는 여자임을 숨기고 총사대원으로 지내며 활동했던 지난 7년간의 생활을 떠올렸다.
수도원에 들어온 지 이제 두 달. 아라미스는 방에 앉아 벽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낮 동안은 엄격한 규율에 맞춰 생활을 했고 매시간 이루어지는 기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지만, 밤이 되면 아라미스의 마음은 외로움과 슬픔으로 사무쳤다.
특히 이 시간, 희미한 불빛 아래 침실에 홀로 있으면, 과거의 기억들이 슬금슬금 덮쳐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토스의 곁에 있었던 그 밤. 아토스의 품에 안겨 느꼈던 따뜻함과 그의 속삭임. 그의 손길. 아라미스는 그런 기억들을 애써 밀어내며 눈을 감았다.
“잊어야 해......"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아토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프랑소와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야.”
아라미스는 두 손을 모아 기도 자세를 취했다. 눈을 감고 기도문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떨렸다.
“프랑소와, 당신의 영혼이 그곳에서도 평화롭기를......"
하지만 기도가 깊어질수록, 아라미스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기억들이 맴돌았다.
프랑소와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들. 그의 부드러운 미소, 지적이고 품위 있는 태도, 그리고 그녀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항상 예쁘게 바라봐 주던 그의 눈빛.
7년 전 16세 소녀였을 때. 아라미스가 '르네'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시절, 프랑소와는 르네에게 완벽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16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순수하게 사랑했고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프랑소와는 저택을 급습한 도적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르네는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총사대에 들어갔고 마침내 복수를 마쳤다.
그러나 프랑소와의 원수를 갚고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아라미스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토록 그를 사랑했을까?”
7년 전, 르네는 약혼자 프랑소와를 죽인 철가면의 정체를 찾기 위해 '아라미스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하고 파리의 총사대로 들어갔다.
아라미스는 신입시절 아토스에게 검술을 배웠고 무서운 교관이었던 그의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야 했다. 수년간의 훈련과 실전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정식 총사가 되었다. 그리고 삼총사로써 누구나 알만한 최고의 전사가 되었다.
그동안 아라미스는 총상과 참혹한 부상들을 겪으면서 전장에서 살아남았다. 거대한 전쟁을 통해 프랑소와를 죽인 원수를 찾아 자신의 손으로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복수의 끝은 공허함 뿐이었다.
“나는 왜 그토록 그의 복수에 집착했을까?”
아라미스의 이런 의문은 기도를 중단하게 만들었다.
아라미스는 천천히 손을 내려 무릎 위에 얹었다.
프랑소와는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남자였다. 그렇지만 그 사랑이 단순히 애정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어릴 적 아버지가 살아계신 순간의 장면들.
그녀의 7살 이전의 삶은 흐릿하고 몽롱했지만, 아버지의 사랑 속에 행복했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르네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하며 참 많이 그리워했다.
아라미스는 침대에 누운 채로 조용히 속삭였다.
“프랑소와를 아버지처럼 느꼈던 건 아니었을까......"
프랑소와는 단순히 연인이 아니라, 그녀의 어린 시절의 빈자리, 갈망했던 무언가를 채워주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보호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프랑소와가 아라미스를 칭찬하거나 부드럽게 바라볼 때마다, 아라미스는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었는지 다시금 느꼈다.
그 모든 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아버지를 프랑소와로 대신 채우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아라미스는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며 숨을 내쉬었다.
“프랑소와...... 당신을 사랑했어. 정말로 사랑했어. 하지만그게 진짜 사랑이 맞았던 걸까?”
아라미스의 떨리는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고요한 밤에 아라미스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2. 진정한 사랑
수도원에 들어온 지 벌써 7개월째.
성당의 조용한 기도실에 앉아 있던 아라미스는 자신의 손으로로 몸을 감싸 안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태동, 생명의 온기가 느껴졌다.
파리를 떠나 수도원으로 오기 전날, 아라미스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토스와 같이 밤을 보냈다.
서로가 정말로 사랑했지만 아라미스는 그를 떠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아파하면서도 아라미스가 떠나는 것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도원 생활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난 후 아라미스는 자신의 몸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라미스는 이미 아토스를 떠나 온 상태였다.
처음 수도원에서의 고요한 일상은 아토스에 대한 사랑의 추억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지만 임신으로 배가 조금씩 불러오면서, 더 이상 아토스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아토스를 떠올리며 다시금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에게 이 아이가 있음을 알려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아라미스가 총사대를 그만두고 수도원으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있다.
바로 죄책감.
아라미스는 자신의 약혼자였던 프랑소와의 죽음이 자신의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라미스는 복수에 그렇게도 집착했던 것이었다. 죄책감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원수를 갚는 과정에서 그녀는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상당했다. 비록 적이었지만 죽어간 이름 모를 이들의 죽음은 아라미스의 죄책감을 더더욱 가중시켰다. 그들에게 명복을 빌고 싶은 마음도 수도원으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남아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시는 자신 때문에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게 하고 싶은 이유가 컸다.
특히 사랑하는 아토스의 앞날을 위해 더욱 그를 떠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라미스는 자신을 눈물로 붙잡는 아토스를 밀어내고 떠나왔다.
'지금,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인 걸 알면 아토스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안돼. 그는 프랑스를 위해 큰 일을 할 사람이야. 나의 과거로 인해 그에게 짐이 될 수는 없어."
아라미스는 혼자 이 아이를 감당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수도원 정원에서 산책을 하던 아라미스는 멀리서 다가오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그림자, 익숙한 걸음걸이.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믿기 힘든 모습을 확인했다.
“아토스!?”
남루한 여행자의 모습이지만 그것은 아토스가 확실했다.
그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마침내 그녀 앞에 섰다. 아토스의 눈은 그녀를 보자마자 반가움으로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아라미스를 안았다. 아라미스는 놀라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그냥 서 있었다.
“어떻게... 네가 여길...” 아라미스는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아토스는 말 대신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몇 달이든 몇 년이든 기다린다고 했잖아. 네가 다시 오지 않으면 널 찾아간다고 했어. 어디든 얼마나 걸리든. "
"아토스. 제발 다시 돌아가 나는 여기 있어야 해...... "
말이 끝나기 전에 아토스는 막아섰다.
"네가 없는 곳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네가 없는 삶은 그저 껍데기 일 뿐이야. "
아토스는 아라미스의 손을 잡고 다시 말했다.
"미안해, 아라미스. 정말 미안해...... 네가 여기에 있는 줄 알았더라면 더 빨리 올 수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그녀의 배에 손을 올렸다. 불러온 배를 느끼며,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아이가... 우리 아이인 거지?”
아라미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 부둥켜안고 조용히 울었다. 아토스의 손길이 그녀의 배를 감싸는 동안, 아라미스 또한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정신을 가다듬은 아라미스는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또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지? 네가 날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면, 다른 이들도 날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
아토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떠난 후 얼마 안 되어 나도 총사대를 그만뒀어.
여러 수도원을 돌아다니며 금발의 신입 수녀가 있는지 알아봤지. 그런데 이 근처의 술집에서,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임신한 수녀 이야기를 들었어.
혹시 떠나기 전 그날 밤 우리 아이가 생겼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그 금발의 수녀가 바로 너일 거라고 확신 했어.”
아라미스는 그의 말에 깊은 불안을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토스, 누군가 이 소문을 들으면... 나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철가면 부하들의 잔당이 아직도 남아있을지도 몰라. 알잖아. 그들 세력이 엄청나게 거대했던 것을.”
아토스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도 그녀의 우려에 동감했다.
“네 말이 맞아. 당장이라도 널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네 몸이 무겁고, 먼 길을 떠나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출산할 때까지만 여기에서 머무르자. 나는 네 옆을 지키고, 필요하다면 포르토스와 달타냥을 불러올 수도 있어. 내가 이곳의 경비를 강화할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너와 아이를 안전하게 지킬게.”
아라미스는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잠시 마음이 놓였지만,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아라미스는 곧 아토스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그날부터 아토스는 수도원 주변을 경계하며 아라미스와 뱃속의 아이를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밤에는 수도원의 아라미스 방 옆 작은 방에서 그녀 곁을 지켰고, 낮에는 마치 그림자처럼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아라미스는 그런 그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고마움도 느꼈다.
그리고 출산이 다가오는 날까지, 두 사람은 거리를 두고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