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밤
아토스의 고향.
아토스가 물려받은 '라 페르' 백작. 그의 영지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프랑스 중남부의 넓은 들판과 포도밭과 목초지,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크지는 않지만 백작 가문의 경제적 기반이라 할 수 있었다.
아토스와 아라미스, 그리고 라울은 한 달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새벽 일찍 라 페르 영지에 도착했다.
출산 후 어린 라울과 장거리를 여행을 하느라 아토스와 아라미스 모두 피곤에 젖어 있었다.
도착했을 때, 예상보다 훨씬 아늑하고 정갈하게 정리된 저택을 보고 서로 안도하였다.
“우리가 괜히 걱정을 너무 했나 봐,”
아라미스가 한숨 섞인 미소를 짓자, 아토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랜 시간 영지를 떠나 있었는데 내가 없어도 잘 유지되고 있었어.”
아토스는 영지로 출발하면서 저택의 오래된 집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내와 갓난 아들과 같이 영지로 향한다고,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준비를 부탁하였다.
집사는 백작이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온다는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엇보다 백작 부인이 되는 엘레나 데 몬테로라는 여성은 소녀시절 프랑스의 수도원에서 공부한 적 있었으며 스페인 귀족의 양녀라고 하니 그녀에 대한 궁금점도 가중되었다.
아라미스의 스페인어 실력은 출중하였다. 그 어떤 사람도 스페인의 귀족이라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라미스의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외국을 다니는 상단을 운영하며 스페인과의 무역으로 돈을 벌었다.
그때 어머니는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고 라틴어로 된 문서와 오래된 책을 통해 무역에 관한 여러 정보를 얻었었다.
아라미스의 어머니는 어린 르네(아라미스)에게 스페인어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덕택에 아라미스는 스페인어와 라틴어를 능숙하게 읽고 쓸 수 있었다.
아토스는 자신의 영지를 보면서 기대감과 함께 씁쓸한 마음도 솟아올랐다.
올리비에, 즉 아토스는 12년 전 18세 때 첫 결혼에 실패했다.
첫 결혼 상대인 밀라디의 거짓말과 불륜. 그리고 밀라디는 집안의 재산을 빼돌리는 것도 모자라 아토스를 향해 총을 쏘고 자신의 애인과 함께 달아났다. 그는 첫 아내와 같이 살았던 집에서는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았었다.
또 다른 이유,
그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장군이었던 아버지 앙리 드 라 페르 백작은 아토스가 걸어 다니기 시작하자마자 말을 타게 하고 검술을 가르치는 등 마치 군대 훈련을 하듯 엄하게 키웠다. 아버지는 아토스가 제독이 되어 집안의 명예를 지키기를 기대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체벌과 혹독한 훈육방식에 상처받았고 어린 시절부터 부자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었다.
아토스가 18세가 되는 해, 아버지가 주선하는 혼사 자리를 거부하고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영국인인 17세의 여성 밀라디를 결혼 상대로 선택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그녀를 크게 반대하였으나, 아토스는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격렬하게 결혼 허락을 요구하였다. 앙리 백작은 아토스의 반항에 큰 충격을 받으며 어쩔 수 없이 밀라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거역한 아토스의 결혼이 행복했으면 좋았으련만 처절하게 끝이나 버렸다.
목숨 걸고 지켜냈던 결혼이 실패하자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던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정을 붙일 수 없었다.
그는 집과 철저히 거리를 둔 채 본인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파리의 총사대로 들어갔다.
절대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라 페르 영지. 하지만 아내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는 다시 영지로 돌아오는 선택을 하였다. 아토스는 이곳에 오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내면과 싸워 이겨냈다. 더 이상 라 페르 영지는 상처의 공간이 아니었다.
저택에 소속된 인원들은 모두 놀랐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집사는 저택에 도착할 아토스와 아라미스 그리고 아기 라울을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라 페르 백작 부부가 도착하자 집사는 준비한 신혼방을 보여주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방 안은 따뜻한 촛불로 은은하게 밝혀져 있었고, 꽃병에는 향기로운 화초가 꽂혀 있었다. 침대에는 새하얀 레이스가 달린 부드러운 커버가 깔려 있고, 방 한쪽에는 백작 부인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옷장과 화장대가 있었다.
아토스는 묵묵히 방을 둘러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라미스도 8년 전 르네로 살던 시절 이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여자의 물건들을 보며 한편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만져보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짐을 정리하고 목욕을 하며 그동안의 여독을 씻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라울은 아라미스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아라미스는 준비된 요람에 라울을 눕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드디어 둘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라울을 낳은 지 벌써 세 달, 그리고 조촐한 결혼식을 치른 지 한 달 만에 처음 맞이하는 진정한 신혼의 밤이었다.
그들이 같이 남녀로 보냈던 밤은 아라미스가 수도원으로 떠나기 전 이별을 하며 눈물로 보냈던 그날 밤이 다였다.
아이를 품었던 동안, 그리고 수도원에서 라 페르 영지로 이동하는 동안은 서로 긴장된 상태여서 둘만의 낭만적인 시간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토스는 침대 주변을 서성이며 어색한 표정을 보였다. 그의 손은 촛대 옆을 만지작거리고 테이블 보의 레이스의 모양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아토스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아토스,” 아라미스는 아름다운 실크 잠옷을 입은 채 아토스에게 다가가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왜 그렇게 어색하게 있어? 마치 처음인 것처럼.”
아토스는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 후에는...... 처음이니까. 그리고 네가 이렇게......."
그는 아라미스를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를 풀고 가벼운 화장을 한 아라미스의 모습은 이제까지 봤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웠다.
아라미스는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 살짝 기대었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움 타는 사람과 결혼했나 보네.”
아라미스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아토스는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러고 싶은 건 아닌데...... 이게 좀 어색해서.”
아토스가 멋쩍어하며 웃었다.
“어색하다니. 우리가 8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같이 겪었는데?”
아라미스는 그의 가슴에 안겼다.
“이제는 우리 둘 뿐이야. 아토스.”
아라미스의 말에 아토스는 이내 긴장을 풀고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아토스는 그녀의 뺨을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네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 내가 너를 이 정도로 사랑할 줄은 몰랐어.”
아토스가 나직이 말했다.
아라미스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제부터는 우리를 위해 살아가자. 아토스.”
둘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이내 키스는 깊어지고, 방 안의 공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토스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고, 아라미스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자신을 그에게 맡겼다.
결혼 후 부부가 되어 처음인 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더없이 소중하게 느꼈다. 새로운 시작이며,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아토스는 악몽을 꿨다.
아라미스가 철가면 대장에게 끌려갔을 때, 그리고 밀라디에게 잡혀 고문당하던 순간 자신이 아라미스를 위해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해 좌절했던 순간들.
아토스는 깨어나 침대 옆을 봤다. 깊은 잠이 든 아라미스의 표정은 고요했고 숨소리는 편안했다.
아토스는 아라미스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달빛으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라미스의 잠옷 속에 드러나있는 몸의 흉터들이 보였다. 모두 전장에서 얻어진 영광의 상처들이며 삶의 훈장이었다. 아토스는 그녀가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그 흉터 위에 다른 고통이 남지 않도록 목숨을 걸고 아라미스를 지킬 것을 다짐했다.
아토스는 아라미스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조심스레 일어나 창 밖의 달을 쳐다보았다.
"절대 너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할 거야. 내가 너 대신 싸울 거니까. 절대 다시 어둠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아토스는 아라미스를 쳐다보고 달빛 아래 서서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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