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자기 방어
라 페르 영지에서의 생활은 완벽히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 이후 누구에게도 자신들의 행방을 알리지 않았다.
아라미스의 새 이름 '엘레나 데 몬테토'. 그녀의 이름은 라 페르 영지에서는 새롭게 불리었다.
바로 '엘렌 드 라 페르 백작부인'. 엘레나의 프랑스식 이름인 '엘렌 백작부인'으로 불리었다.
라 페르 영지에 도착한 며칠 후,
아라미스는 라울을 안고 창가에 앉아 아토스가 정원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라미스는 8년 전 16세 때, 르네라고 불렸던 시절의 과거를 회상했다.
아라미스는 약혼자 프랑소와의 죽음 이후, 하루하루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르네에게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13세부터 자신을 돌봐준 숙부가 있다. 그는 처음부터 프랑소와를 탐탁지 않아 했었다. 프랑소와는 신분이 귀족처럼 보이긴 하였으나 너무나 비밀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조카 르네보다 16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그의 나이 때문이라도 결혼 허락을 주저하게 하였다. 하지만 르네는 숙부에게 반항하며 약혼을 밀어붙임으로써, 숙부는 어쩔 수 없이 르네와 프랑소와의 사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숙부는 프랑소와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르네를 보며 안타깝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프랑소와의 죽음 직후부터 숙부는 급하게 조카 르네의 결혼 상대를 알아보았고, 수소문 끝에 마땅한 귀족을 찾아내었다.
그 귀족은 유력한 영주의 백작 후계자로서 가문은 물론 능력과 외모 모두 훌륭하였다.
하지만 하나의 흠결, 한 번 결혼에 실패한 적 있었다. 그는 바로 22세의 올리비에 드 라 페르.
반면, 라 페르 백작 집안은 올리비에가 한 번 결혼한 적 있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라 페르 집안은 몸을 낮춰 유명하지 않은 지방 귀족 뤼시 남작의 조카딸인 양친을 잃은 르네와의 결혼을 받아들이겠다 하였다.
숙부는 이 결혼을 통해 라 페르 가문과 연결이 되어 가문의 명예를 드 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르네에게 너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이 결혼이 필요하다고 설득하였다.
르네는 사랑은 고사하고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남자와의 결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결혼식 전 날 남장을 하고 집을 도망쳐 파리의 총사대로 갔다. ‘아라미스‘라고 이름을 고치고 말이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신랑이 될 올리비에 드 라 페르 또한 결혼식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집을 떠나 파리의 총사대에 있으면서 결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올리비에 드 라 페르, 그가 바로 아토스였던 것이었다.
아라미스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총사대에 들어가지 않았어도 결국은 그와 결혼하게 되었을 거야. 나는 이곳으로 올 운명이었던 것이었겠지.'
아라미스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결국 시간을 돌고 돌아 라 페르 영지로 자신을 데려왔다는 생각을 접을 수 없었다.
아라미스는 다시 창 밖의 아토스를 보았다. 여전히 20대 초반 같은 외모와 약간 마르고 군살 없는 몸, 강인한 어깨와 곧은 자세가 여전히 아라미스를 매료시켰다. 아토스는 아라미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시선을 느낀 듯 뒤를 돌아 밝게 손을 흔들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저런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나만 바라보고 있다니.’
그녀는 그를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그를 잃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도 함께 커지는 것을 느꼈다.
저택에 도착한 후 보름간, 두 사람의 하루하루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날들이었다.
서로를 향한 오랜 갈망과 억눌렸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매일 밤 두 사람은 끝없이 서로를 품고 애정을 나눴다. 아토스는 철갑처럼 가두어 놓았던 욕망이 아내 앞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것을 느끼며 그 순간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아라미스는 속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이렇게 사랑에 열정적인데 그동안 대체 어떻게 참고 살았던 걸까? 총사대의 그 긴 세월 동안 정말 애인도, 다른 사랑하는 사람도 두지 않았다니. '
아라미스는 그의 열정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절제되고 금욕적인 과거가 믿기지 않았다.
아토스는 파리의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처음 총사대에 들어온 19세부터 약 10년 동안, 그를 향한 여성들의 구애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어떤 여성들은 아토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맹목으로 달려들었다. 프랑스의 연극배우들, 귀족 여성들 가리지 않고 아토스의 외모, 검술 실력은 물론 그의 귀족 같은 태도에 환호했다.
하지만 아토스는 그 어떤 여성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주변의 등쌀로 여성들과 잠시 교제한 적은 있었지만 결코 깊은 관계까지 가는 법이 없었다.
그를 아는 여성들은 아토스의 맘 속에 다른 여자가 있다느니, 과거의 상처로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다느니, 아니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을 무성하게 했다.
아토스는 첫 결혼에 실패한 이후 철저히 여성들과의 관계를 차단했다.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 22세가 되는 때, 총사대에 남장을 하고 들어왔던 16세의 아라미스를 만나며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 아토스는 아라미스가 여자인 것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며 신입으로 들어온 그녀를 가르쳤다.
아라미스의 굳은 의지와 끝없는 노력 그리고 따뜻한 마음은 아토스의 억압된 마음에 조금씩 균열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아토스는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인정할 수 없었다. 아라미스는 자신의 제자이며, 전우였다. 후일 삼총사가 되어 우정을 맹세한 형제 같은 친구였으므로 결코 여자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라미스에 대한 마음은 그저 전우애 내지는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라미스를 여자로 보게 된다면 총사대의 균형은 깨질 것이다. 만약 아라미스가 남장여자인 채 총사대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이 들통난다면 보수적인 종교계가 총사대를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그녀를 종교재판에 서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토스는 아라미스에게 이런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래서 아토스는 아라미스와 감정적인 거리를 두려 노력했다.
아토스는 차후 아라미스가 죽은 약혼자 프랑소와의 복수를 위해 총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더 가까이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아토스의 불행했던 과거는 그의 불안을 증폭시켰고 혹시나 아라미스를 사랑하다가 헤어지게 된다면 그녀를 친구로도 잃을까 봐 두려워 멀리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토스는 아라미스에 대한 마음을 최대한 숨겼다. 마음속에서는 수 없이 아라미스와 연인이 되는 상상을 했지만 그런 상상조차도 허락할 수 없다고 다시금 마음을 잡았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부부가 되었다.
이제는 다르다.
아토스는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인지 생각했다. 그녀의 숨결, 미소, 심지어 장난스럽게 던지는 한마디마저도 그에게는 삶의 기쁨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이 모든 걸 왜 더 일찍 그녀에게 말하지 못했을까?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렸던 걸까?’
'좀 더 나의 상처를 벗어던지고 라 페르의 영지로 오겠다는 용기를 더 빨리 가졌어야 했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라미스를 더 끌어안았고, 8년 동안 그녀를 지키기 위해 제대로 된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던 시간까지 채우려는 듯 더욱 뜨겁게 그녀를 안았다.
영지에 도착한 지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두 사람의 열정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낮에는 서로의 주변에서 소소한 일상을 즐기고, 밤에는 그동안 참아 왔던 사랑을 마음껏 나누며 오롯이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냈다.
영지의 하인들조차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속삭이곤 했다.
“백작님이 이렇게 밝게 웃으시는 건 처음 본 것 같아요.”
“그러게요. 백작부인과 라울 도련님이 오시고 나서 뭔가 완전히 달라지셨어요.”
아토스는 과거에 아라미스와 강제 결혼할 뻔한 인연을 만들어 준 아버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비록 당시에는 서로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아라미스와 아토스는 그 인연이 서로를 더 끈끈하게 만들어 주었다 생각했다. 이에 아토스는 평생 동안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라미스와 라울과 같이 하는 시간은 그에게 진정한 치유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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