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어가는 괴로움'
라 페르 저택에는 아토스의 유모, 로잔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장년의 여성이었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격식 있는 태도에서 오랜 세월의 연륜이 묻어났다. 로잔 부인은 아토스를 어린 시절부터 돌봐온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잃고 외롭게 자라던 아토스에게 유모 이상의 존재였으며, 그의 상처와 고뇌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이었다.
아토스의 어린 시절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10살 때 어머니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재혼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아버지는 가문의 성공을 위해 아토스를 엄격히 교육하며 사랑보다는 책임을 강조했다. 로잔 부인은 아토스의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아토스를 친자식처럼 돌보며 그의 곁을 지켰다.
아토스의 첫 결혼이 비극으로 끝났을 때, 로잔 부인은 누구보다도 그를 걱정하며 그의 곁을 지켰다.
총까지 쏘고 도망쳤던 첫 부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아토스는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고, 로잔 부인은 그가 또다시 사랑으로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그를 보호하려 했다.
19세의 아토스가 총사대로 떠난 이후, 아토스는 고향 집과 거의 연락을 끊었다. 로잔부인은 아토스가 총사대에 들어간 후에도 저택을 돌보며 그가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2년 전, 아토스의 새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또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아토스는 아라미스와 라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돌아오게 되었다.
아라미스가 라 페르 저택에 처음 들어왔을 때, 로잔 부인은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밀라디에 대한 상처 때문이기도 그렇지만 아라미스가 라 페르 백작에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라미스가 아름답고 세련된 것은 인정했고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누구보다 품위 있게 행동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이었다. 백작 부인은 가끔 덜렁대며 남자처럼 급하게 걸었고, 백작을 주먹으로 툭툭 친다던지, 칼을 잡는 흉내를 내며 방안을 휘젓는 등. 남자처럼 자유분방하게 행동할 때마다 로잔 부인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행동으로 백작부인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그녀를 의심하며 관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라미스는 로잔 부인의 의심을 서서히 해소시켰다. 비록 가끔 실수를 했지만, 늘 예의 바르고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다른 귀족 부인들처럼 보석에 관심이 있거나 사치를 하지도 않았고 라울을 직접 돌볼 때와 백작을 챙기는 모습에서도 따뜻한 성품이 드러났다. 로잔 부인은 아라미스의 이런 점이 백작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 이후, 로잔 부인은 아라미스를 따뜻한 눈길로 보게 되었다. 이제 마음속으로 백작 부인을 존중하며, 라페르 저택의 새로운 주인으로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라페르 영지에서의 생활은 처음에는 꿈만 같았다. 신혼의 달콤함 속에서 아토스와 아라미스는 서로에게 충실했고, 라울을 돌보며 소박한 행복을 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에게 현실이 덮쳐왔다.
아토스는 영지를 돌보는 데 매일같이 바빴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던 탓에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농민들과의 계약, 세금 문제, 영지 방어 준비 등으로 밤낮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는 매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라울을 겨우 안아주고는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아라미스 또한 라페르 백작부인의 역할에 적응해야 했다. 라 페르 집안의 전통과 의례를 배우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영지 사람들에게 품위 있는 주인으로 보이기 위해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했다. 그녀는 총사 시절처럼 자유롭게 말을 타거나 칼을 다루던 자신을 잃어가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한때 모든 것을 걸고 싸웠던 아라미스는 이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잔을 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곤 했다.
아토스는 그런 아라미스를 눈치챘다. 그녀가 라울을 돌보는 동안 종종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거나, 드레스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본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총사대 검술의 달인인 아라미스를 잃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 때문이라는 미안함이 들었다.
어느 날, 그는 몰래 준비한 것을 가지고 아라미스를 찾았다. 아라미스가 라울을 돌보는 방에 들어온 아토스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랑 같이 나가지 않을래?”
“어디로?”
아라미스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토스는 그녀에게 손수 맞춘 승마복을 건넸다.
“너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준비했어. 한 번도 영지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잖아? 같이 말을 타고 둘러보자.”
아라미스는 그 옷을 보고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준비한 거라면 뭐든 좋아.”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넓은 들판을 달렸다. 밤하늘처럼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초록빛 풍경 속에서, 아라미스는 오랜만에 자유를 느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말발굽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들이 잠시 멈춰 말을 쉬게 할 때, "선물이야~!"
아토스는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아라미스를 향해 던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칼을 받아 들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뭐야?”
“시합하자. 총사대 시절 검객 아라미스의 실력을 보고 싶어.”
아토스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아라미스는 그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아토스 각오해. 내가 지진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은 들판 한가운데에서 칼을 맞대며 웃었다. 마치 다시 총사시절로 돌아간 듯 그들은 서로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며 기술을 주고받았다. 아토스는 오래간만에 칼을 잡았음에도 날카로운 아라미스의 움직임에 놀라면서도 오랜만에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도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가까스로 아토스의 승리.
시합이 끝난 뒤, 아라미스는 헐떡이며 칼을 내려놓았다.
“너무 오랜만이라 손이 좀 굳었나 봐.”
아토스는 아라미스를 보며 말했다.
“아니, 여전히 훌륭해. 역시 총사대 최고의 테크니션 같네.”
그 말에 아라미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 내가 다시 나를 찾은 것 같아. 고마워, 아토스.”
아토스는 고민 끝에 결심을 내렸다.
원래 그는 다시 아라미스에게 칼을 잡게 않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라미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자신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아토스는 매주 2번은 영지의 가장 한적한 곳에서 둘만의 검술 훈련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도록 약속을 철저히 지키고, 그 시간만큼은 모든 일을 미루기로 다짐했다.
아토스가 훈련을 제안했을 때, 아라미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당신이 요즘 얼마나 바쁜지 내가 너무 잘 알아.”
아토스는 고개를 단호히 저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널 위해서라도 이 시간을 지킬 거야. 그리고 나도 네 칼 솜씨가 녹슬지 않게 도와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그들의 검술 훈련 시간은 단순히 실력을 유지하는 것 이상이 되었다. 서로 웃고 떠들며,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예전 총사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곤 했다.
아토스는 검술 훈련을 제안한 이유를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마음속에 과도한 책임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약 아라미스를 노리는 적의 급습 같은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자신이 아라미스와 라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아토스는 자신이 그들을 위해 죽더라도 아라미스는 살아남아 그녀의 몸을 지킬 수 있도록 실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라미스는 그의 아내이기 이전에, 자신과 함께 숱한 전장을 누볐던 전우였다. 그녀의 칼끝은 누구보다 예리했고 판단은 명석하며 냉철했다. 아토스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매일 밤 아토스는 혼자 어두운 정원에서 늦게까지 검술 연습을 이어갔다. 아라미스의 실력을 더 올리기 위해선 자기 자신이 한발 더 앞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어느 밤, 아라미스는 검술 훈련으로 피곤해 곯아떨어진 아토스를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아토스… 정말 바보 같아. 그렇게까지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아라미스는 총사대 시절 아토스를 떠올렸다.
아토스는 항상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총사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실력이 삼총사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믿었고, 그것이 아라미스와 다른 동료들을 자극하고 더 크게 성장하게 할 동기가 될 것이라 여겼다.
결혼 후에도 그의 완벽주의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완벽주의는 때로는 그를 지치게 했지만, 그것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아토스는 계속적으로 자신을 단련시켰으며 아라미스에게도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아라미스는 훈련에 지쳐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아라미스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아토스, 당신은 이미 완벽해. 하지만 내가 당신을 넘어서려 할수록 당신은 더 멀리 가려고 하겠지.’
아라미스는 그를 지켜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