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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악몽 그리고 질투

밀라디 이야기

by 랜치 누틴


아라미스는 로잔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토스의 첫 부인 밀라디에 대해 자세히 듣게 되었다. 밀라디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이었지만, 그 속에는 탐욕과 음모가 가득 찬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아토스를 배신하고 애인과 도망친 사건 그리고 그로 인해 아토스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에 대해 듣는 동안 아라미스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로잔 부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지금 자신이 지내고 있는 이 집이 바로 아토스와 밀라디가 함께했던 집이라는 사실도 아라미스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아라미스도 알고 있었다 밀라디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자였는지.

아토스는 철가면 일당에게 붙잡혀있는 아라미스를 구하기 위해 밀라디를 죽음으로 몰았다. 그녀는 그 일에 항상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아라미스는 1년 전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루이 13세 국왕의 모후가 아들의 왕위를 뺏기 위해 스페인과 비밀리 진행했던 조약의 비밀문서가 있었다. 그 문서는 아라미스의 죽은 약혼자 프랑소와가 들고 있었다. 프랑소와는 죽기 전에 그 문서를 숨겨놨었고 문서의 행방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라미스는 그 문서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아라미스는 프랑스의 운명이 걸린 조약문서를 찾아 없애기 위해 프랑소와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성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철가면 일당이었던 밀라디의 손에 사로 잡혔다.

철가면 조직의 잔존 세력인 밀라디는 아라미스를 천장에 매달고 심문을 시작했다. 아라미스는 강한 눈빛으로 밀라디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아무리 협박해도 조약 문서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을 거야.”

밀라디는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그렇게 나오리라 예상했지. 하지만 괜찮아. 입을 열게 할 방법은 많으니까.”

밀라디는 손짓으로 부하 피사르를 불렀다. 그는 채찍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피사르는 차가운 눈빛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아라미스는 이를 악물며 비명을 참아냈다. 몇 대의 채찍질이 이어졌고, 숨이 거칠어질 즈음 성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밀라디는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부하들이 달려와 보고했다.

“밖에 두 명의 총사대원이 아라미스를 찾으며 성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밀라디는 조롱하듯 웃으며 말했다.

“아토스와 포르토스가 왔군. 예상대로야. 그들도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토스와 포르토스도 함정에 걸려들었고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밀라디는 아라미스를 향해 비웃으며 말했다.

“네 친구들까지 여기 갇히게 되었으니, 이제 네가 잘못했다는 것을 충분히 느꼈을 거야.”

밀라디는 다시 피사르에게 명령했고 그는 다시 채찍을 들었다. 아라미스는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밀라디는 정신이 희미해진 아라미스를 깨웠다. 그녀는 부하들에게 천장에 매달린 아라미스를 내려에서 의자에 앉히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을 잠시 방에서 나가게 했다. 말라디는 조용히 아라미스에게 속삭였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니?”

밀라디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직했지만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아토스의 전 부인이야."

아라미스는 놀라며 옆을 돌아 밀라디를 바라보았다.

"아토스는 평생 나를 미워하고 경멸했겠지......"

밀라디는 이어서 말했다.

"네가 철가면 요새에 포로로 잡혔을 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감옥에서 아토스가 자존심을 버리고 너를 살려달라면서 내게 무릎 꿇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난 널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 내가 아토스와 한 약속이 없었다면 너는 그때 철가면 대장의 손에서도 죽었을 것이고 여기서도 벌써 죽었을 거야.”

아라미스는 그 말을 듣고 놀랐지만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밀라디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네게 매질을 이 정도에서 멈추는 이유는 그와의 약속 때문이야.”

밀라디는 안타까워하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부하들은 나와는 다를지도 몰라. 그들이 널 어떻게 할지는 전적으로 너에게 달려 있어.

저 아래 붙잡힌 아토스를 살릴 방법을 생각해. 그러지 않으면 너와 그들 모두 이곳에서 영영 나갈 수 없게 될 테니까.”

밀라디의 말은 차가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향한 연민이 담겨있었다. 밀라디는 조용히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정적만 남았다. 아라미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쓰라린 고통 속에서도 아토스를 떠올렸다.

‘아토스가 나를 위해... 저 여자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는 전 부인을 누구보다 미워했다. 아토스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녀의 가슴 한편이 저려왔다.

“아토스...” 아라미스는 다시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후 아토스와 포르토스는 혼신을 다해 감옥을 탈출하여 아라미스를 구하러 왔고 결국 철가면 일당은 모두 소탕되었다.

끝까지 저항하며 도망치던 밀라디는 결국 발을 헛디디고 떨어져 죽고 말았다. 아라미스는 밀라디의 최후의 순간을 바라보는 아토스의 얼굴 표정을 잊지 못했다. 원망과 조소 어린 듯한 미소.

그러나 아라미스는 내심 알고 있었다. 아토스는 밀라디를 그렇게 저주했겠지만 밀라디는 아토스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었다는 사실. 그 둘은 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밖에 없던 것을.

아라미스는 아토스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전 부인이던 밀라디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졌다.


아라미스는 자신의 외모와 밀라디의 외모를 비교하는 영지의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했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밀라디의 외모와 매력을 찬양하며 그녀가 왜 떠났는지에 대해 무성한 소문을 퍼뜨렸다.

“지금의 백작 부인의 자태도 아름답지만 첫 부인은 정말 절세 미녀였대. 백작님이 왜 그녀와 헤어졌는지 모르겠어.”

이런 이야기들이 수시로 들려왔다. 아라미스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 말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혔다. 그런 소문을 들은 아라미스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거울 앞에 섰다. 최대한 아름답게 자신을 꾸미고, 고운 드레스를 입은 채 아토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를 맞이할 때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토스는 아라미스의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환하게 웃었다.

“오늘따라 더 예쁘네, 아라미스.”

그의 칭찬은 진심이었지만 아라미스는 오히려 그 말에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결국 어느 날 아라미스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말을 타고 영지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한참을 달려 끝없이 펼쳐진 풀밭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말에서 내려 숲 속 풀 위에 누웠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천천히 움직였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여전히 속이 시끄러웠다.

아라미스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그대로 잠들었다. 꿈속에서도 자신을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밀라디와 비교하는 사람들, 그리고 밀라디에 대한 죄책감 이 모든 것에 스스로를 질책하는 자신의 목소리.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저물 무렵,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아라미스!”

멀리서 아토스가 말에서 내려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염려와 약간의 화가 섞인 표정이 역력했다.

아라미스는 잠에서 깨며 저 멀리 말을 타고 다가오는 아토스의 표정을 보았다. 그 표정은 너무나 익숙했다. 단호하면서도 걱정하는, 혼내는 동시에 보호하려는 눈빛. 불현듯 그날이 떠올랐다.


남장을 하고 총사대에 들어가 아토스에게 훈련을 받던 17세 신참 시절, 아라미스는 크게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칼을 다룰 때 죽은 약혼자를 생각하느라 방심했던 아라미스는 자신도 모르게 칼날을 자신의 방향으로 떨어뜨렸고 아토스가 겨우 잡아 큰 부상을 막았다. 아토스는 그 자리에서 뺨을 때렸다.

“이러면 네가 죽을 수도 있어!”

그의 목소리에는 화보다 걱정이 더 묻어났었고, 아라미스는 그 순간 아토스가 한편 원망스러우면서도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다.

지금 아토스가 보여주는 표정도 그때와 똑같았다. 걱정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아토스는 말을 세우고 아라미스에게 걸어왔다. 그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아라미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는 아라미스를 단번에 잡아 일으키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가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아라미스는 그의 말을 막으려 했지만, 아토스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스스로 자신을 아프게 몰아 놓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어도, 네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건 도저히 못 참아.”

아라미스는 아토스의 목소리와 표정을 보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고개를 돌리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냥... 혼자 있고 싶었어.”

하지만 아토스는 그런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아라미스의 어깨를 꽉 붙잡고 말했다.

“혼자 있는 건 좋은데, 왜 위험한 방법을 택하냐고. 아무도 없는 데서 네가 쓰러지거나 아니면 너를 아는 누군가가 발견했다면 어쩔 건데?”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걱정이 담겨 있었다. 아라미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항상 내가 원망스럽지? 나 때문에 밀라디가 죽었었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밀라디 미모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아토스는 아라미스의 말을 듣고 한순간 멈칫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밀라디와 비교한다고?”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라미스, 넌 밀라디와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야. 넌...”

그는 말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걸 알면서 왜 너 자신을 그렇게 깎아내리냐?”

아라미스는 그의 진지한 말에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라미스는 아토스가 끌어안은 품속에서 오랫동안 눌러왔던 눈물을 흘렸다.


아토스가 라페르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밀라디와의 결혼 실패는 그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곳은 그녀와의 기억이 곳곳에 스며든 장소였다. 한때 그는 이 저택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다. 이번에는 아라미스와 라울,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아토스는 저택 곳곳을 걸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밀라디와의 결혼 생활은 그에게 고통과 배신만을 남겼지만, 이제는 그 기억이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깨달았다. 밀라디가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총사대로서의 삶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아라미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라울을 안고 있는 아라미스를 보며 생각했다.

‘밀라디와의 결혼은 나를 무너뜨렸지만 그 덕분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어. 아라미스와 라울이 내 삶의 전부야.’

아토스는 로잔 부인에게도 이야기했다.

“밀라디가 나를 떠난 것이, 어쩌면 나에게는 축복이었어. 그때는 그걸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건 운명이었고, 내가 사랑이라는 걸 진정으로 알게 된 건 엘렌 덕분이야.”

로잔 부인은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결국 마음을 열게 된 백작부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조금 독특하지만 분명 당신을 위한 사람인 것 같아요. 부인과 함께라면 백작님의 과거도 다 치유될 거예요.”


그 순간 아토스는 자신의 과거가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아라미스를 만나고 사랑하게 된 것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다음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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