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사대 시절 상처의 흔적
라 페르 영지의 첫겨울은 유난히 길고 춥게 느껴졌다. 이번 겨울 하늘은 연일 흐렸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토스는 자주 몸의 여기저기가 불편해졌다. 옛날 전투에서 얻은 상처들은 평소에는 괜찮았지만 습기 찬 날씨에는 그 상처의 흔적이 되살아나듯 조여 왔다. 심하게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과거의 고통이 몸에 남아 자신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는 문득 아라미스를 떠올렸다. 자신처럼 수많은 전투와 고난을 겪어왔는데 지금 이 비 오는 날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까?
아라미스는 라울을 품에 안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세하게 피곤함을 느끼는 듯했다. 아이를 안는 동작도 어딘가 불편해 보였고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로잔 부인은 그런 아라미스를 보며
“아이를 낳은 부인들은 한동안 안 좋기 마련인데. 백작 부인께서는 좀 더 힘들어 하기는 것 같네요. 시간이 더 지나면 좀 나아질 거예요.”라고 위로했지만 아토스는 그 이유가 다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라미스가 겪는 불편함은 아이를 낳고 몸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번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칼과 총에 맞아 피를 흘렸고, 혹독한 날씨 속에서 싸웠으며, 숱한 위험 속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졌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때의 상처들에 더해 새로운 고통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괜찮아?”
로잔 부인이 방을 나간 뒤 아토스는 아라미스에게 나직이 물었다.
아라미스는 침대에 앉아 라울을 재우며 아토스를 바라봤다.
“괜찮아.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야.”
하지만 아토스는 아라미스가 고통을 애써 숨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몸이 안 좋은 거 라울 때문이 아니라는 거 알아.”
아라미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그래. 옛날 상처들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예전보다 몸이 약해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어.”
아토스는 옆에 앉아 말했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비가 오면 여기저기가 다 아파. 상처라는 게 그런 거니까.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 아는데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마.”
아라미스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토스는 아라미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마. 네가 나보다 훨씬 더 고생했을 텐데... 이제는 나한테 기대도 돼.”
그날 밤 아토스는 창밖의 비를 바라보며 아라미스를 걱정하며 같이 잠을 청했다. 그녀의 상처를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었고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다짐이 솟아났다.
아토스는 6년 전 그날을 생각했다.
1621년 프랑스에 내전이 일어났다.
아라미스가 총사대에 들어온 지 벌써 1년 반이 넘어 18세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견습 대원이었고 같이 들어온 다른 대원들이 하나둘씩 정식 총사가 되었지만 그녀는 아직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라미스는 조금이라도 빨리 정식 총사가 되기를 원하며 전장의 경험을 쌓기 위해 프랑스 내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아라미스를 가르치던 아토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라미스의 검술 실력은 이미 수준급으로 올라왔지만 작전 참여 같은 실전 경험은 전무한 상태였다.
'아라미스는 전쟁의 잔혹함을 몰라. 사람을 죽여보기는커녕 짐승조차 죽이지 못하는데... 저 녀석 정말 어떡하려는 거야?'
아토스는 아라미스가 걱정되어 굳이 참전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토스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한 달째 이어지는 전장은 아라미스에게 상상 이상의 참혹함을 안겨주었다.
아라미스는 검을 휘두르며 적과 맞섰지만 아직 사람을 해칠 용기가 없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순간,
전장에서 아라미스는 몇 명의 적들이 둘러싸여 있었고 검술로 사활을 다해 적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아라미스는 숙련된 솜씨의 칼로 적들을 모두 쓰러뜨린 후 검을 멈추고 물러섰다. 그녀는 치명상을 입은 적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적을 모두 쓰러뜨렸어. 더 이상 해치지 않아도 돼. 이제 끝났어”
그러나 아라미스의 어설픈 자비심은 적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아라미스의 칼날에 쓰러졌다고 생각한 적들 중 한 명은 온 힘을 다해 총을 들어 아라미스를 겨누었다. 아라미스는 그 총구를 보고도 몸이 얼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 순간, 아토스가 아라미스를 감싸고 온몸으로 밀어냈다.
“쾅!”
총성이 울렸고 아토스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아토스는 총을 맞은 상태에서도 단도를 집어 총을 겨눈 적에게 던졌다. 적은 단검에 맞아 최후를 맞이했다.
아라미스는 눈앞에서 아토스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아토스! 왜 나를 구하려고... 당신이 부상을 입었잖아요!”
아라미스는 부상당한 아토스를 부축하며 적을 피해 숲 속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내가 망설이지 않았다면... 더 빨리 적을 처리했다면... 아토스가 나서는 일이 없었을 텐데......'
아라미스는 눈물을 삼켰다. 자신의 어설픈 자비가 스승이며 동료인 아토스를 죽음의 문턱에 몰아넣을 뻔하였다.
숲 속에는 아토스와 아라미스뿐이었다. 적이 주변에 있을 가능성도 있어 아토스는 고통을 참으며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아라미스는 떨리는 손으로 그가 가르쳐준 대로 치료를 시작했다.
“아라미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넌 나한테 배운 대로만 하면 돼.”
아토스는 숨을 거칠게 쉬고 통증을 참으며 차분히 아라미스를 격려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라미스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치료하는 손은 조금씩 떨렸다.
"잘하고 있어. "
그는 피를 흘리고 있으면서도 아라미스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했다. 아라미스는 숲 속에서 치료를 마친 후 피로 옷이 물든 아토스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미숙한지 이제야 알았어. 적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결국 내 동료가 죽게 될 것이야. 전쟁터는 그런 곳이니까.”
초 여름이지만 숲의 밤은 차가웠다.
총상으로 움직이기 힘든 아토스를 위해 숲 속에 숨은 아라미스는 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불을 피우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숨어 있어야 했다.
부상을 입은 아토스는 열이 떨어지면서 오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아토스?"
아라미스는 작은 목소리로 아토스를 걱정하며 물었다. 아토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나를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아침이면 기온이 오를 거야. 좀만 참자.”
아토스는 아라미스를 안심시키려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아라미스는 그의 상태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저체온증으로 위험해질 것 같았다. 아토스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를 꼭 안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의 몸을 따듯하게 데워 그의 오한을 막으려 했다.
아토스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아라미스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의 감촉을 느끼며 깜짝 놀랐다. 그녀의 가슴의 감촉 따뜻한 숨결... 모든 것이 여자로서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너는... 정말 여자가 맞구나. '
아토스는 아라미스가 여자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느끼며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 몸이 이런 상태인데도 이런 느낌이 든다니.'
아라미스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아토스에게 들킬 수 있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따뜻해질 수 있도록 그의 등을 꼭 안았다. 지금은 아토스를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아라미스는 아토스의 곁에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아토스의 고요한 숨소리가 아라미스의 귀에 들렸다. 숨소리는 아라미스의 마음을 침착하게 만들었다.
“이 상황인데도 나는 아토스 곁에 있는 것이 왜 이리도 안정되는 걸까?”
아라미스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평온해진 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토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라미스 품의 따뜻함을 느끼며 총상의 통증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밤을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동이 터 오르고 그들은 서로 기대어 잠시 잠이 들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다. 아토스와 아라미스가 동료에서 남자와 여자로 서로 바라보게 된 사랑의 씨앗을 만든 순간이었다는 것을.
창 밖으로 비가 그쳤다.
라 페르 저택의 벽난로 앞에 앉아있던 아토스와 아라미스는 수년 전 당시를 생각하며 서로를 마주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