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 가스통의 등장
라페르 영지에 정착한 이후 아토스와 아라미스의 나날은 평화로웠다. 낮에는 각자의 일을 돌보고 밤에는 벽난로 앞에서 함께 와인을 마시며 애틋한 시간을 보냈다.
아토스는 아라미스를 마음껏 사랑했지만 집 밖에서는 늘 조심스러웠다. 아라미스가 총사대에 몸담았던 과거와 그 시절 얽혔던 비밀들 때문에 신분이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공적인 자리에서 아라미스에게 항상 얇은 베일을 쓰도록 권유했다. 주일마다 아라미스는 백작부인의 신분으로 아토스와 함께 성당에 갔고 누구보다 단정한 모습으로 얼굴을 가리는 베일 달린 모자를 쓰곤 했다.
그런데 그날 성당에서 문제가 생겼다. 한 귀족이 다가오며 아토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아토스. 당신이 라 페르 백작님 이라니.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토스는 그를 알아봤다.
샤를 드 가스통. 파리에서 악명 높은 호색한이었다. 그는 옆 마을 먼 친척 귀족의 초대로 우연히 지방에 내려왔고 주일을 맞이하여 라 페르 영지의 성당에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입가에는 반가운 듯 미소가 서려 있었지만 아토스는 직감으로 그 속에 감춰진 악의를 느꼈다.
“오랜만이군.” 아토스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가스통의 눈은 슬쩍 아라미스를 향했다. 베일 너머로 그녀의 눈빛을 살피려는 듯 위아래로 훑던 그의 시선이 꺼림칙했다.
“부인이신가요? 참으로 우아하신 분이군요.”
아라미스는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아토스는 알고 있었다.
‘저 자식이 알아차렸을까......’
아토스는 가스통이 아라미스를 기억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가스통은 과거 총사 시절의 아라미스를 아름다운 남자로 알고 접근했었다. 당시 아라미스의 아름다움에 호기심을 느끼며 접근하는 남자들이 흔했기에 별일 아닌 것으로 지나갈 수 있었지만 가스통은 보통의 다른 남자들보다 더 집요하고 야비한 인간이었다.
아토스는 가스통의 행동을 못 마땅해하며 몇 번 주의를 준 적 있었다. 하지만 가스통은 그의 경고를 무시했다.
아라미스는 가스통의 집적거림을 꾹 참았으나 오랜 시간 집요하게 접근하는 그의 행동에 참다못해 주먹을 날렸고, 그 일로 아라미스는 근신 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다.
가스통은 비열하고 교활한 자였다. 단순히 아라미스를 알아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실 가스통이 라 페르 영지에 발을 들인 이유는 단순한 여행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이웃 마을에서 이미 소문을 들었다. 라 페르 영지의 새로운 백작 부인은 스페인 출신의 미모의 여성이며 특히 우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는 소문을 말이다. 가스통은 이 소문을 듣고 그 백작부인을 어떻게든 자신이 유혹해서 넘어오게 하겠다는 얄팍한 속셈으로 마을을 찾아왔다.
그러나 성당에서 아토스와 마주쳤을 때 가스통은 예상치 못한 사실에 당황했다. 그곳의 영주가 자신과 관계가 껄끄러웠던 바로 삼총사의 아토스였던 것이다.
“이게 누구십니까, 아토스!” 가스통은 억지로 웃음을 띠며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넸다.
“당신이 라 페르 백작이라니... 정말 놀라운 인연이군요.”
그러나 그의 눈길은 이미 아라미스를 향하고 있었다. 베일을 쓰고 있긴 했지만 그녀의 미모는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 얼굴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데... 아니, 설마.’
그는 속으로 의심했다. 아토스의 부인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녀가 아라미스일리 없다. 그가 기억하는 아라미스는 분명 총사였고 남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가스통은 아토스와 아라미스를 계속 관찰했다. 그는 특히 부인의 말투나 몸짓에서 과거 아라미스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가스통은 과거 총사대원 아라미스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그는 아라미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비틀린 욕망을 품고 있었다. 지금 아라미스가 여성으로서 아토스의 부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의 마음속에서 오래된 욕망이 다시 살아났다.
‘이제야 알겠군. 아토스 네 부인이 이렇게 매혹적이라니...... 저 여자를 내 손에 넣어야겠군.’
그는 속으로 악랄한 생각을 하며 겉으로는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그는 아토스가 성직자와 성당 내부에서 대화하는 동안, 아라미스 혼자 성당 입구에 서 있는 틈을 타 그녀의 몸에 실수로 살짝 부딪치는 척을 하며 아라미스의 모자를 떨어트리게 만들었다.
그 여인의 얼굴은 예상처럼 총사대의 그 아라미스가 확실했다.
“부인,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모자를 떨어뜨렸군요.”
그는 정중히 손을 내밀었고, 아라미스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스통은 그녀의 손에 신사적으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오늘 밤 12시에 성당 대문 앞으로 나오시지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라미스는 가스통의 속셈을 꿰뚫었지만 아토스가 이 상황을 눈치채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거두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아라미스는 몸을 돌려 서둘러 성당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가스통이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
성당에 홀로 남은 가스통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아토스! 네가 지키고 있는 그 여자를 내 손에 넣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야. 내가 이기지 못할 여자는 없다.”
그는 속으로 자신만의 비열한 계획을 세우며 성당을 떠났다.
아라미스는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날 밤, 아라미스는 침실에서 잠을 자는 척하더니 조심스레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아토스는 그녀가 일어나 옷을 입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아토스는 침대 옆에 놓인 칼을 챙기고 조용히 아라미스의 뒤를 따랐다.
아라미스는 망토를 입고 어두운 길을 걸어갔다. 그녀는 마침내 성당 옆 외딴 골목에 도착했다. 가스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짙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사악함으로 번뜩였다.
“라 페르 백작부인... 아니, 아라미스. 참 오랜만이군.” 가스통이 낮게 말했다.
“그 이름 부르지 마.” 아라미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도 그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있군. 하지만 내가 그 비밀을 흘려버린다면 당신과 라 페르 백작은 무슨 꼴이 될지 생각해 봤나?”
아라미스는 입술을 꽉 물었다.
“너는 종교 재판을 받게 될 거야. 여자의 몸으로 신성한 총사대를 더럽혔으니. ”
아라미스는 오늘 낮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가스통은 더 악랄한 말을 던졌다.
“그런데 내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이 있지. 단순해! 나와 하룻밤을 보내면 된다. 그래도 될 만큼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우니까.”
가스통은 아라미스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은 아라미스의 얼굴을 거쳐 몸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당신을 원해. 아라미스...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손 당장 치워라, 가스통.”
아토스는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의 눈은 날카롭게 번뜩이며 가스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토스...” 아라미스가 놀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넌 물러서.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토스가 낮게 말했다.
가스통은 잠시 움찔했지만 곧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아 백작님. 너무 화내실 것까진 없지 않습니까? 그저 농담이었을 뿐인데.”
“네가 농담을 한 것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한다.”
아토스는 칼끝을 가스통의 목 가까이 들이밀었다.
“한 번만 더 내 아내에게 접근하려 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날 줄 알아라.”
가스통은 겁에 질린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좋아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지만... 백작님 기억하시오. 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이대로 물러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비밀을 터트리면 당신 아내가 어떻게 될지는 잘 알아서 판단하시지요.”
그는 성급히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토스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 아라미스를 돌아봤다.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마. 너도 알잖아. 네가 뭘 하든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아라미스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아토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난 너를 지키겠다고 맹세했어. 네가 나를 믿지 않으면 그 맹세가 무슨 소용이겠어?”
두 사람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욱 철저히 대비하기로 했다.
며칠 뒤, 마을에는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샤를 드 가스통이 술에 잔뜩 취해 술집을 나오고는 강가의 가파른 둑에서 발을 헛디뎌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머리를 크게 다쳐 즉사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듣고도 애도를 표하기보다는 은근히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가스통은 영지 내 머무르는 동안에도 귀족의 신분을 악용하여 마을의 부인들이나 아가씨들을 성가시게 하고 술집에서 돈을 내지 않았으며 이에 항의하는 술집 주인을 때리는 등 비열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의 죽음을 두고,
“그런 일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이라는 수군거림이 퍼졌다.
사건이 벌어진 날 라 페르 저택에서도 여러 말들이 오갔다.
“가스통이 죽었다고?” 아라미스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아토스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잔에 와인을 따랐다.
“술에 취해 발을 헛디딘 모양이지. 술집 주인이 그렇게 증언했어. 아무래도 단순 사고로 보여.”
아라미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에게 또 무슨 일을 벌였을지 모를 일이었어. 이런 결과가 난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네.”
아토스는 아라미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기억될 거야. 다들 그가 마을에서 한 짓을 떠올리며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을 테니까.”
도시에서 파견된 수사관은 몇 가지 조사를 진행했지만 특별한 살인의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가스통은 사건 당일에도 술에 잔뜩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그의 사망은 단순한 사고로 처리되었고 사건은 자연스럽게 잊혀 갔다.
아라미스는 아토스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며칠 동안 영지의 저택에서 멀리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아토스가 자신의 곁에 있어준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그러나 아토스는 그날 밤 홀로 서재에서 와인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그는 잔을 비우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넌 다시 내 사람에게 손을 대지 못할 거다. 가스통.”
그 밤 이후 가스통의 이름은 서서히 잊혀 갔다. 마을 사람들도 그 사건을 서서히 잊었고 라 페르 영지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아라미스는 가스통의 말에 순간 공포심과 분노가 치밀었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칼을 잡아 그의 목숨을 끊어야 할지 깊게 고민했다.
그러나 아라미스가 결단을 내리기 전에 가스통은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실 가스통의 위협이 점점 다가 올 조짐을 보이자 아토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가스통이 떠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집요함과 사악함은 아라미스뿐 아니라 라 페르 영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었다.
‘아라미스에게 절대 이런 짐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돼. 그녀를 지키는 건 내 몫이니까.’
아토스는 가스통과 직접 마주치지 않고도 그를 영지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는 가스통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했고 술과 방탕한 생활에 취약한 그의 약점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가스통이 죽기 전날, 아토스는 사람을 통해 은밀히 가스통에게 술값을 떼인 술집 주인에게 접근했다. 주인에게 금화를 주며 다음과 같이 부탁을 했다.
가스통에게 술을 마음껏 제공하되 독하지 않은 맥주와 술을 섞어 마시도록 유도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짠 치즈를 잔뜩 제공하고 그가 목이 타면 물 대신 맥주를 실컷 주라고 이야기했다.
가스통은 평소보다 술에 더 취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의 발걸음을 더욱 흔들거리게 만들었다.
아토스는 직접적으로 그의 죽음을 초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도록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가스통의 죽음 이후 아라미스는 처음에는 단순한 사고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토스가 칼을 잡지는 않았더라도 어딘가에서 이 일을 몰래 계획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아라미스는 조용히 말했다.
“가스통이 죽었을 때 당신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지.”
아토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런 인간은 언젠가 자기 행동의 대가를 치르게 돼.”
“하지만 그 대가를 당신이 조금 앞당긴 건 아니고?” 아라미스가 더 깊이 물었다.
아토스는 그 순간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라미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였어. 네가 다시 칼을 쥐는 것을 막는 것.”
아라미스는 그의 말을 들으며 혼란스러웠다. 아토스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아라미스 자신도 가스통을 없앨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된 건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아토스의 행동도 정말 옳은 일이었을까?’
가스통의 죽음은 영원히 사고로 남았고 두 사람은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미스는 아토스가 자신에 대한 애정과 그의 냉정함이 합쳐져 어둠의 세계로 본인을 밀어 넣었는지 생각하곤 했다.
아토스는 아라미스를 위해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날 가스통에게 행했던 일들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행동이 아라미스와 자신의 영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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