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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페르 영지와 결혼반지

프러포즈를 기억하며

by 랜치 누틴

라페르 영지에 정착한 이후 아라미스는 백작부인의 역할을 해야 했고 공적인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남편과 같이 성당에 가거나 영지의 중요한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토스는 라페르 영지에 정착한 이후 집 밖에서는 늘 조심스러웠다. 아라미스가 남장을 하고 총사대에 몸담았던 과거와 그 시절 얽혔던 비밀들 때문에 신분이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그는 아라미스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항상 얇은 베일을 쓰도록 권유했다.

“필요 이상의 관심을 받지 않는 게 좋아.”라는 그의 말은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아라미스의 아름다움으로 다른 남자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싫다는 아주 인간적인 마음이 숨어 있었다.

아라미스는 외부에 나갈 때 아름다운 옷을 입고 머리를 정성스레 꾸미며 얇은 베일로 얼굴을 살짝 가렸다. 비록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베일 사이로 엿보이는 눈빛과 품위 있는 몸짓은 영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알리기 충분했다.

마을 곳곳에서는 아토스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10년 만에 라 페르의 후계자가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돌아왔다는 소식에 영지 내 여성들은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일부러 성당 근처나 시장에 나가곤 했다.

아토스는 서른이 되었지만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단단한 몸은 평범한 귀족들의 몸과는 달랐고 그의 품위 있는 태도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비록 그가 모든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절세 미남은 아니었지만 그의 차분한 눈빛과 가끔씩 보이는 은은한 미소는 오히려 더 강한 매력을 주었다.

아라미스는 그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아토스는 언제나 인기가 많았다. 총사대 시절에도 라페르 영지에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고 특히 여성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아라미스는 자신의 손끝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토스는 곁에 있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설레게 만드는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아토스가 라 페르 영지로 돌아와 직접 경영하면서 전 보다 크게 풍요로워졌다. 영지 주민에게는 최대한 저렴하게 농지를 이용할 수 있게 하였고 국가에 내야 할 할당량 만을 세금으로 걷고 백작가의 이익은 최소한으로 가져갔다. 그 대신 아토스는 외국의 여러 서적을 탐독하며 개량된 농사 방법을 알리고 생산량을 더 올린다던지 북부 지역으로 영지에서 생산된 와인을 판매한다던지 하며 이익을 남겼다. 그 이익은 다시 영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는 영지의 젊은 청년들에게 직접 검술을 가르치며 방어체계를 든든하게 하였다. 평민이라도 실력만 있으면 중요한 일을 맡기고 든든한 임금을 챙겨주었다.


아라미스는 아토스의 꿈을 알고 있었다. 그는 총사대시절 부터 후일 재상이 되어 프랑스를 훨씬 더 부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꿈을 사랑했다. 그러나 아토스는 아라미스를 지키기 위해 중앙정치를 버리고 영지로 돌아왔다. 아라미스는 자신을 위해 꿈을 포기한 아토스에게 항상 미안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토스는 자신의 영지에서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아라미스를 다독였다. 그는 중앙 정부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신의 영지 내 작은 프랑스를 만들며 실현하기 시작했다.

아라미스는 그런 아토스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총사대에서 무기와 장비를 관리하고 문서를 정리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영지에서 관리되는 농사 기구나 방어 무기 등을 관리하며 필요 없는 비용이 나가지 않도록 했다. 물건을 사고 판 기록들도 꼼꼼히 서류도 정리하였고 영지 관리에 대한 의견을 아토스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또한 다른 귀족여성들이 사교 모임을 통해 자신들의 가문의 위세를 알리는 데 비해 아라미스는 불필요한 일에 거의 돈을 거의 쓰지 않았다. 비단으로 만든 옷은 특별한 공적인 일에만 입었고 평상시에는 무명옷에 장식을 달고 모조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를 착용하면서 사치를 줄여갔다. 대신 절약한 돈으로 영지 내 고아나 홀로 된 여인들 또는 가난한 노인들을 위해 썼다.

검소한 생활과 영지를 위한 노력을 통해 영지의 주민들은 라 페르 백작과 백작부인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들이 영지로 온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라페르 영지의 겨울은 흐린 하늘과 습한 공기로 가득했지만 저택 내부는 벽난로의 따뜻한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로잔 부인은 아라미스와 차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백작부인,”

로잔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작과 부인께서 아직 결혼반지를 끼지 않으시던데 혹시 준비를 안 하신 건가요?”


아라미스는 잠시 멈칫하며 로잔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황한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마침 방에 들어오던 아토스가 로잔 부인의 질문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그... 그건......"

아토스는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아직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로잔 부인은 그의 머뭇거림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곧 아라미스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백작부인께서는 어떻게 청혼을 받으셨나요? 참 궁금하네요. 백작께서는 참으로 진지하신 분이니 청혼도 특별했을 것 같은데요?”

아라미스는 그 질문에 순간적으로 웃음을 잃었다. 수도원에 있을 때 아토스가 던졌던 단순하고 직설적인 청혼의 순간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반지도 장미꽃도 없었다. 대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그의 진심이 있었다.

“그건...... 음, 특별한 상황이었죠,”

아라미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백작님은 낭만보다는 현실적인 분이시니까요.”


로잔 부인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며

“그래도 백작께서 반지 하나는 준비하셨을 텐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을 들으며 아라미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번에 나를 위해 준비했던 검이 결혼 선물인 게 아니었나? 그게 더 아토스 다운 방식이지.’

아라미스는 혼자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토스는 그 상황에서 점점 더 어찌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결혼반지 하나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마를 때렸다. 물론 저번에 검을 준비하며 아내를 생각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혼 선물로는 적절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날 밤, 아토스는 서재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아라미스는 형식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반지 같은 것에 별로 개의치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뭔가 제대로 된 것으로 결혼의 증표를 주지 못한 것 같아 스스로를 한심해했다.

‘결혼 선물로 검을 주는 사람이 대체 어딨 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생각한 그는 자신의 서랍 속에서 어머니의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던 오래된 반지를 꺼냈다. 금은 조금 바랬지만 섬세하고 단아한 디자인이었다. 아토스는 손가락으로 반지를 만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걸 아라미스에게 줘도 될까......?”

결국 그는 결심했다. 아토스가 아라미스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진심이었으므로 이 반지도 진심으로 전달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음 날 저녁, 아토스는 아라미스가 혼자 있을 때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이거... 늦었지만 너한테 줄게.”

아라미스는 그가 건네는 반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야?”

“반지. 결혼식 때 준비 못 한 거 지금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어서. 이건 어머니의 유품이야. ”

아토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라미스는 잠시 반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가락에 끼우며 살짝 웃었다.

“늦었지만 아주 마음에 들어. 고마워 아토스.”

아라미스의 미소에 아토스는 안도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잔 부인의 질문은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라미스는 벌써 1년이 넘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아라미스가 파리를 떠나 수도원에 혼자 정착한 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예상치도 못한 임신을 확인하고 혼란에 빠졌다.


아라미스는 당시 원장 수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불행한 일을 겪고 아이를 낳는 수녀들이 전혀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곳은 아이를 키우는 곳이 아니랍니다. 선택은 두 가지뿐 이에요. 아이를 입양 보내거나 고아원으로 보내야 해요.” 원장수녀는 단호하게 말했고 곧이어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우선 낳는 것까지만은 도울 수 있습니다. 이후의 선택은 당신의 몫이에요.”


대화 이후 아라미스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수도원을 나가서도? 아니면 아토스에게 연락해야 할까?’

아라미스는 기도를 하며 대답을 구했다.

‘하지만 아토스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어.’ 아라미스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어느 날 밤, 기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뱃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지만 이내 그것이 태동임을 깨달았다.


‘이 아이가 나에게 말하고 있어...... 엄마 여기 있다고.’

그 순간 아라미스는 자신의 배를 만지며 결심했다.

‘이 아이를 내가 직접 키울 거야. 수도원을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라미스의 배가 점점 불어오기 시작한 어느 날,

아토스는 프랑스 전국의 수도원을 뒤져 아라미스를 찾아왔다.

아토스는 한동안 무릎을 꿇은 채 아라미스의 손을 잡고 있었다. 눈물이 고인 그는 깊은숨을 내쉬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결혼하자 아라미스.”

아라미스는 그 순간 말을 잃었고 떨리는 손을 놀란 가슴 위에 대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토스는 확실히 결심을 한 듯 말을 이어갔다.

“너와 뱃속의 아이를 내 영지로 데려갈 거야. 거기서 함께 살며 아이를 키우자. 내가 너를 책임질 거야. 더 이상 혼자 힘들게 하지 않을 거야.”


그의 말은 단호하고 애절했다. 아라미스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아토스...... 난 수도원에 있을 작정이었어. 여기서 아이를 낳고, 그다음엔......”


그녀의 말을 끊고 아토스는 단호하게 물었다.

“그다음엔 뭐?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고 너는 계속 수도원에서 살겠다는 거야? 아니면 혼자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거야?”


아라미스는 그의 목소리에 압도되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럴 순 없어 아라미스. 네가 떠나 있는 동안 나는 매일 네 생각만 했어. 너만 있으면 돼. 다른 것은 필요 없어. 내 명예든, 영지든, 뭐든 상관없어. 너와 그리고 이 아이가 필요해.”


아라미스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눈빛 속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을 진심을 느꼈다.

“아토스...”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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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스는 아라미스를 일으켜 세우며 손을 꼭 잡았다.


“네가 나와 함께 영지로 가자고 결정만 해주면, 나머지는 모두 내가 해결할게. 네가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을 거야. 이제 그만 나에게 기회를 줘.”


아라미스는 한참 동안 그의 손을 잡은 채 망설였다. 하지만 그때 뱃속의 아이가 움직이는 태동을 느끼며 결심했다. 아라미스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토스... 네가 정말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더 이상 피하지 않을게. 함께 하자.”


그 대답에 아토스의 눈에 눈물이 흐르며 아토스는 아라미스를 품에 꼭 안았다.

“고마워, 아라미스. 내가 너와 우리 아이를 위해 모든 걸 바칠게.”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아토스와 아라미스 그리고 뱃속이 아기. 세 사람의 생명이 함께 있었다.


>>>끝. 다음 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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