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곡. 라흐마니노프 2번
라흐마니노프라는 작곡가를 대중들의 기억 속에 각인시킨 것은 영화 '샤인(Shine)'의 역할이 크다.
1997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쥠으로써 영화는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영화 속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을 계속적으로 이야기했으며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영화 속 주인공은 실존인물로서 호주계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이다. 그는 라흐(이하, 라흐마니노프 ) 3번을 연주하다가 곡의 어려움과 무대의 압박감에 못 이겨 쓰러지고 정신분열이 생긴다.
라흐 피아노협주곡 3번이 그렇게 어려운 곡일까? 사람을 미치게 할 정도로 말이지. 당시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다. 라흐마니노프의 곡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 만큼 어려운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문제였다는 것을.
나는 라흐마니노프를 알기 위해 1999년 Shine의 OST 음반을 구입하였다. 이 음반에는 3번 피아노 협주곡 편곡본이 들어있다.
두 번째로 라흐마니노프를 접한 것은 필립스에서 나온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및 '파가니니를 위한 랩소디'가 포함된 전집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이 음반을 통해 비로소 그의 모든 협주곡을 제대로 듣게 되었다.
오랫동안 라흐 3번 만을 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같이 수록되어 있는 2번 협주곡을 듣게 되었는데 뜻밖이었다. '어 이거 뭐지?' 2번이 너무 좋은 것이다.
언젠가부터 3번보다 2번이 훨씬 좋게 느껴졌다. 특히 2악장의 선율에 감동을 받으며 눈물지었던 일이 몇 번인지 모른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op.18)은 (1901년)에 작곡되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 Serge Rachmaninoff '영원한 레드오션'
- 그의 시대에는 가장 촌스러운 음악으로. 100년 후에는 가장 세련된 음악으로.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은 인상주의 시대이다. 드뷔시, 라벨, 사티 등 프랑스에서 활발했던 인상주의 음악가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였다.
러시아는 유럽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이다 보니 아무래도 당시 주류의 음악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다. 라흐마니노프는 국민악파적인 낭만 음악에 머물러 있었고 20세기에 편승하여 작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918년 러시아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많은 음악가들이 망명을 시작했다. 그는 공산주의를 피해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미국 주류음악은 인상주의를 넘어 현대음악 또는 Pop, JAZZ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그는 주류인 조지 거슈윈 같은 현대음악에 스며들지 못하고 평생을 19세기 후기 낭만음악에 머물렀다.
그의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일까. 그는 평생 영어를 읽고 쓰지 못하고 러시아어만 썼다고 전해진다. 음악에 대한 고집처럼 미국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러시아의 국민성을 간직한 채 미국에서 죽어갔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살아있는 동안 공산당이 집권하는 소련에는 돌아가지 못했다.
살아있을 당시에는 주류와 벗어난 음악을 하고 있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았을 때 과연 누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시대에 맞지 않다고 하겠는가.
연주자 : 피아니스트(소련-러시아) Sviatoslav Richter 스뱌토슬라프 리히터
리히터를 '리히테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아버지는 독일계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고 했다. 서방계와 연결고리가 있었으므로 냉전시기에는 소련 밖으로 나가서 연주 활동을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혹시나 독일로 망명하지 않을까 하는 소련 정부의 우려 때문에 에밀 겔리스와는 다르게 서구 사회에서 연주활동은 제한되었다. 하지만 리히터의 연주를 들어본 서방의 피아니스트 사이에는 전설의 연주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라흐마니노프가 저주했던 공산주의. 그러나 리히터는 사회주의의 체계적인 음악교육에 가장 큰 혜택을 본 연주자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잠식하기 전 리히터, 에밀 겔리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등 소련 출신 연주자들은 사회주의식 엘리트 피아노 교육을 받았고 세계를 흔들었다.
이 음반은 차이콥스키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다. 서방의 카라얀의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리히터가 같이 연주하는 음반이지만 음반의 진정한 묘미는 숨겨져 있는 라흐 피아노협주곡 2번에 있다.
바르샤바에서 연주된 리히터의 연주이며 지휘자는 비츠로키(Wislocki). 서방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를 위해 음반사는 바르샤바에서 연주를 녹음했고 서방에 대대적으로 소개를 해서 유명해진 음반이라 들었다.
개인적으로 리히터의 피아노 연주는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흐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리히터의 연주를 최고로 친다. 협주곡 1악장 오프닝부터 다른 피아니스트의 연주와는 비교가 되지를 않는다.
1악장 서두 '크렘린 궁전의 종소리'의 중압감에서 이미 곡은 리허터에서 시작되었고 이미 종결지었다.
pp(피아니시모)에서 점점 커지며 ff(포르티시모)로 가는 과정은 디지털 볼륨 버튼으로 한 칸씩 올리는 것처럼 전율을 일으켰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슬픈 역사를 아주 조심히 끄집어내서 가장 크게 소리치게 되는 순간까지 자신을 있는 힘껏 내보이는 느낌이었다.
2악장은 목관악기로 속삭이듯 나가온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리움을 다시 꺼내 부끄럽게 보여준다.
그야말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리히터에 의한, 리히터를 위한 곡이 아닌가 싶다.
가장 고집스러운 작곡가와, 작곡가의 거울 같은 연주자와 만남.
부드러운 2악장을 사이에 두고 1, 3 악장이 부드럽게 품어준다.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반쪽씩 공유하고 있는 그림이다. 아주 큰 교집합을 갖는 협주곡.
전 회차에서 소개했던 베토벤의 황제와 쇼팽의 협주곡 1번은 큰 1악장, 느리고 비교적 짧은 2악장, 가벼운 3악장을 갖는 구성이다. 이와 다르게 라흐의 2번은 모든 악장이 평등하면서도 서로의 악상을 주고받는다.
악장의 구분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냥 3개의 Part라고 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러시아의 음악들은 한국인의 정서와 상당히 잘 맞는다. 이 서늘한 날씨에 정말 어울리는 음악이 아닐까 싶다.
이런 완벽한 곡을 들은 적 있나요?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말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 음악 하나로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러시아의 서늘하고 넓은 평원을 사랑하게 되네요.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2 in C minor (Op.18)
1. I. Moderato (보통빠르기)
2. II. Adagio sostenuto(지속적인 아다지오)
3. III. Allegro scherzando(빠른 스케르초)
끝.
글을 다 쓰고 찾아보니, 비교 영상이 있길래 참조로 영상을 붙였습니다.
https://youtu.be/BYOxQknart0?si=e5XGLzWVWki1bRt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