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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아노 이야기(1)

K사 디지털 피아노에 지름신이!

by 랜치 누틴

사고를 쳤다.

이사 준비와 여러가지 개인 문제로 정신 없이 바쁜 요즘인데, 디지털 피아노 공동구매 글을 보고 바로 질러버렸다. 왜 하필 이 시기에 굳이 디지털 피아노를 샀느냐.


몇년전까지만 해도 집에 피아노 3대를 두던 적이 있었다.

맑은소리 고운소리의 영창피아노, 자취 할 때 부터 들고 다녔던 카시오 디지털 피아노 AP-25, 직장인 밴드를 한다고 돌아다녔을 때 구입한 야마하 신디사이저 S03.

집안에 문제가 생겨 집을 팔고 도망치듯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집을 절반 이하로 줄여가다 보니 업라이트 피아노는 도저히 가져갈 수 없었다. 크기도 크기이지만 방음도 엄두가 안났다. 그래서 업라이트는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 기증을 했고 신디사이저는 '당근마켓'에 팔았다.

그러고나니 카시오의 AP-25 디지털 피아노만 남았다. 이 피아노는 2003년에 샀으니까 벌써 20년이 넘었다. 당시에는 실제 피아노와 유사한 건반이라 소개를 해서 상당히 기대를 했었지만 치면 칠 수록 디지털은 한계가 확실했다.

이제는 세월의 흔적으로 바디가 변색된 상태에 건반이 울퉁불퉁하고 볼륨 조절도 완전하지 않지만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었다. 평소에 피아노 연습은 학원에서 하거나 연습실을 빌려서 어쿠스틱으로 하기에 피아노가 필수는 아니지만 처음 곡을 배울 때는 가끔 디지털 피아노로 손가락 연습을 하기에 쓸모가 있다.

이번에 이사를 가면서 오래된 피아노를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 집이 좁아서 디지털피아노 옆에 고양이 화장실을 두었는데 깔끔하지 못한 우리집 고양이가 자꾸 디지털피아노에 실례를 퍼부었고 피아노 다리가 누렇게 되었다.

몇 년 뒤 돈을 모아 좋은 드림 피아노를 살 희망이 있으므로(NU1X 사는 것이 목표라.) 소리가 좋고 터치가 좋은 200만원대의 어중간한 가격의 디지털 피아노를 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 학원에도 자주 못 갈텐데 당장 연습할 무언가는 필요했다.

'중고를 사 볼까?' 가성비 좋은 녀석을 업어올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5년만에 당근 앱을 깔았고, '디지털피아노'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너무 오래된 것들 투성이고 모델의 질에 비해 가격도 착하지 않았다. 거기에 화물을 불러 운송비를 고려한다면 새것이 더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도 한푼이 아쉬웠기 때문에 10만원대의 싼 것이라도 사서 몇 년 버텨볼까 싶어서 이것저것 알아봤다. 아 그러다가 잘못사서 수명이 얼마 안 남은 놈을 건져 온다면 어떡하지? 그것도 문제일 것 같았다.


며칠 전 우연히 디지털피아노 커뮤니티 가입했다가 KORG LP-380U 공동구매를 하는 것을 보고 오늘 아침에 바로 질러버렸다. 가성비 최고의 피아노로 시중가보다 10여만원 저렴하기도 했고 왠지 사야할 것 같은 기운이 꿈툴거렸다. 그리고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2주 후에 설치를 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피아노의 질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디지털은 아무리 좋아봐야 전자제품일 뿐이니까.


지금 형편이 좋지 않았는데도 이렇게까지 피아노에 집착을 하다니.

사실, 나는 어릴 때 부터 피아노 소리를 좋아했다.

집에 굴러다니는 테이프가 있었는데 7살 무렵부터 이 테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했다. 40년이 넘은 테입이다.

곡 목록은.

A 면

1. 엘리제를 위하여 - 베토벤

2. 터키 행진곡 - 모짜르트

3. Die Marionetten -Rohde

4. 뱃노래 - 멘델스죤

5. 군대행진곡 - 슈베르트

6. 월광소나타 1악장 - 베토벤

7. 흥겨운 대장간 - 헨델

8. 즉흥환상곡 - 쇼팽

9. 이별의 곡 - 쇼팽


B면

1. 유모레스크 - 드보르작

2. 뻐꾹왈츠 - 요한슨

3. 즐거운 농부 -슈만

4. 코시코프의 우편마차 - 네케

5. 꽃노래 - 랑케

6. 노래의 날개위에 - 멘델스죤

7. 즉흥곡 90-2 - 슈베르트

8. 아마빛 머리의 소녀 - 드뷔시

파란색 색깔의 곡은 쳐 봤던 것 같다.


테이프에 곡 제목이 너무 작게 적혀 있어서 이 곡 제목을 다 아는데 수십년이 걸렸다.

어렸을 때 집안이 풍족하지 않아서 피아노를 그렇게 좋아했는데도 피아노학원을 다니지 못했다. 국민학교 반 친구들이 혼자가기 심심하다며 나를 데려갔다. 나 또한 피아노학원을 따라 가는 것이 싫지 않았다. 친구들이 바이엘을 치고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나오기를 수십번. 길을 지나가다가 좋아하는 피아노 곡이 들리면 피아노 학원 입구에 한참을 서있고 가곤 했었다.

어느날 항상 나를 자기의 피아노 학원에 데려가는 아이가 우리집에 놀러왔다. 난 이 주황색 테이프를 틀어주고 "어때?" 라고 물어봤다. 당연히 그 아이도 나처럼 감동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그 아이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피아노 학원을 다닌다고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인이 되어 피아노를 다시 시작한지가 벌써 20년이 넘었다. 이후로 피아노를 쉬지않고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내가 20년 넘게 피아노를 쳤다고 하면 "정말 잘 치시겠네요?" 라고 물어본다.

그럴때는 아마추어 야구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한다. 아무리 성인이 되어 취미로 야구를 오래 했어도 '스트라이크' 하나 제대로 던질 수 없다고. 절대 프로는 될 수 없다고 말이다. 덧붙여 피아노도 야구와 똑같다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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