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출처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죽기 전에 해야 할 몇 가지’를 적어둔 어떤 글에서 유난히 마음에 남는 구절이 있었다. ‘악기 하나쯤은 배워서 연주할 수 있을 것’ 그래서 다룰 수 있는 악기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놀랍게도 음계를 칠 수는 있어도 ‘연주’ 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악기는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20년 만에 플루트를 다시 잡게 된 계기다.
비교적 입시에서 자유로웠던 초등학교 때, 나는 다양한 악기를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사주신 피아노가 악기 학습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금방 실증을 느껴 체르니 30번에서 피아노 라이프는 종료되었다. 뒤 이어 배운 바이올린은 학교 방과 후 교실 수업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사실 바이올린이 좋기보다 학예회 때 하얀 드레스를 맞춰 입고 친구들과 함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시작했던 것이었다. 잿밥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바이올린 또한 역시나 학예회가 종료된 이후 한 번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 악기는 ‘플루트’였는데 IMF 사태와 함께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계속 레슨을 받기 어려워져 그만두게 되었다. 플루트는 어린 나에게 대한민국 근현대사 상 중요한 사건이 어린이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아직도 레슨을 그만두던 그 날이 생각난다. “이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 악기는 그만하고. 알았지?”
플루트를 마지막으로 나는 약 20년간 악기와 담을 쌓고 지냈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악기는 내방 언저리에 항상 보관되어있지만 한 번도 열어본 적은 없었다. 관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 셈이다. 여러 번 이사를 가면서 악기를 버릴 기회가 있었다.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할 때는 외할아버지가 사주신 피아노를 눈물을 머금고 중고로 팔기도 했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플루트를 버리지 않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니 자의에 의해 그만둔 악기가 아니기도 했고 언젠가 다시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2019년 35살이 되던 해에, 플루트 악기함을 놀랍지만 처음으로 열었다. 이미 썩어서 고물이 되었을 거라 예상했고, 결과는 역시나 만질 수 없게 색이 바랜 상태였다. 20년간 방치된 채 거의 미라 수준이 되어버린 플루트를 보고 며칠간 고민했다. 결국 악기를 들고 낙원상가의 용하다는 수리점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혹시 이거 수리가 가능할까요?” 악기 상태를 보고 조금 많이 놀란 표정의 사장님은 말했다. “이거 한 20년 된 거네. 요새는 다 인도네시아 산인데 이거는 일제라 좋은 악기야. 고치면 잘 고칠 수는 있겠네.” 적지 않은 수리비였지만 유년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악기를 그대로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선뜻 이곳에서 악기를 수리했다.
수리한 지 일 년째, 그렇게 나도 플루트도 한 살이 더 먹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악기 연주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코로나로 반강제 칩거생활을 하게 되면서 집에 있게 되는 시간이 전보다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문득 수리해놓고 또다시 일 년간 방치된 플루트를 보게 되었다. 4월 한 달간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씩 꾸준히 연습을 했다. 현재 나는 몇 번의 ‘삑사리’를 내고 나면 악보를 보지 않고 음을 따서 플루트를 불 수 있는 수준이다. 온갖 악기를 제대로는 아니지만 찝쩍댄 덕택에 20년 쉰 거 치고는 수월하게 한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아직 숨이 가쁘고 손이 많이 아프지만 ‘김광진의 편지’를 어설프게나마 완성했다. 매 월 가능하면 한 곡씩 연주해보려고 한다. 올해는 아직까지 시작이 좋다.
사장님의 꼼꼼한 수리로 주인 잘못 만나 고생하던 악기가 새롭게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