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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착한 사람입니다

by 난화

요즘은 '착함'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시대인 것 같다. 착하게 살면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착하기 때문에 참아야 하고, 참다가 병이 생기고, 제대로 할 말도 못 하고, 무시도 당하고, 바보 취급을 받기도 하니까 여러모로 생존에 불리하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참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는 우주 저 멀리 날려 버리고 나의 소중한 몸과 마음에 불편을 끼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민원을 넣고, 소송을 걸고, 국민 신문고에 올리고, SNS에 공유하고, 유튜브에서 마구 목소리를 낸다. 나 혼자 구시렁거릴 때는 쌀알만큼 불쾌했던 일도 세상에 꺼내어 공론화되면 대포알 같은 폭발력과 파급력을 지닌다.


관행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던 '갑'질의 폭력에 정당하게 맞서는 '을'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힘을 얻는 일은 그래도 우리 사회가 정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1인 채널이 보편화되고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이 일상화되면서, 친구와 통화하며 속을 풀고 말 정도의 일도 세상과 함께 분노할 일로 공론화되는 일이 잦아졌다. 온갖 만행으로 나를 괴롭히는 시가 식구도, 내 새끼를 다치게 한 유치원 같은 반 아이와 그의 부모도, 배달한 음식에 서비스를 빠트린 업체도, 말도 안 통하고 지 양말도 똑바로 세탁 바구니에 넣지 못하는 남편도, 세상에서 심판받아 마땅할 자가 되고 말았다.


너의 권리를 누려라! 참지 마라! 들이받아라! 공공연한 메시지 속에 살고 있어서일까.


나는 참느라 골병이 들고 홀로 숨죽여 우는 착한 사람에게 끌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원칙적으로 착한 사람은 없다고 본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할 것이다. 그 와중에 계산 없이, 손해가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미련하게 구는 착한 사람을 보면 좋을 수밖에 없다.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똑똑하고 야무진 사람들이지만, 이 세상을 너그럽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착한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당신이 참은 것은 미련하거나 바보라서가 아니라, 자신을 상처 입히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게 있어서라고, 그러니 자신의 착함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가족 안에서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닌 게 늘 괴로웠다. 내 안에 헝클어진 감정들이 주체할 수 없이 튀어나와 엄마를 상처 입히고 동생을 힘들게 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동생은 엄마에게 요구하는 게 없었다. 수학여행을 가는 날, 동생은 돈을 받아 가야 하는데 말을 하지 못해서 현관에서 한참 서성거리다 집을 나섰다. 학교 선생님께 만 원을 빌려서 쓰고 엄마에게는 끝내 말을 하지 못해 결국 갚지 못했다고 했다. 동생은 장난감을 사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고, 사춘기 때도 옷이나 신발 한 번 사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스무 살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하자마자 받은 월급을 봉투채 조용히 안방 방문 아래로 밀어 넣었다. 혹시 엄마가 미안해할까 봐 직접 주지도 못했다.


나는 엄마가 돈이 없는 걸 알아도 그냥 집을 나서지는 못했다. 학교에 가서 혼나는 게 무서웠고,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은 아이로 낙인찍히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마련해 내라고 엄마를 졸라서 물감이랑 붓, 물체 주머니를 샀다. 엄마는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돈을 빌리거나 다니던 공장에 가불을 받거나 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엄마의 사정은 외면했다. 학년이 바뀌면 문제집도 사달라고 했고, 중학교에 가서는 4만 원이나 하는 영어 듣기 테이프세트를 사달라고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카세트테이프를 사달라고도 했다. 사춘기 때는 애들이 입는 소매가 한껏 부푼 티셔츠를 사고 싶다고 졸랐다. 고3이 돼서는 치킨도 먹고 싶고, 피자도 먹고 싶다고 했다. 학원도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피아노도 배우고 싶었다. 나는 왜 자꾸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걸까. 왜 그 욕심을 꿀꺽 삼키지 못하고 입 밖으로 꺼내어 엄마를 힘들게 하는 걸까.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니구나, 했다.


그러나 사실 억울했다. 나는 책을 읽고 싶고, 공부를 잘하고 싶고, 악기를 배우고 싶고, 학교에서 모범생이 되고 싶은 것뿐인데 왜 내가 이렇게 나쁜 아이가 되어야 하는지 속상했다. 학교에서 망신당할 자신이 없고, 친구들처럼 나도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던 건데... 말을 꺼내도 슬프고, 삼켜도 슬프던 시절이었다. 나는 기어이 말들을 꺼내 놓았지만 마음이 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구들은 나더러 착하다고 했다. 회사에서 적응을 못하고 그만둘 때 선배들은 내가 마음이 너무 여리고 착한 게 문제라고 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나보고 착한 선생님이라서 좋다고 했다. 심지어 우리 엄마도 나한테 그렇게 시달리고도, 나에게 착한 딸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떠나고, 나는 그에게 상처 준 일들만 깊게 각인되어 남았기 때문이다.


엄마, 얼마 전에 좋은 상담 선생님을 만났어.

그분이 나한테 그러더라고.

선생님은 태생이 착한 분이에요.

착하기 때문에 그렇게 상처받은 거예요.


내가 얼마나 울었는가 몰라.

정말 아이처럼 꺼이꺼이 울었어.

이제 그만 나를 미워해야겠다고.

그 시절의 나를 이해해 줘야겠다고.

진심으로 결심할 수 있었어.


누군가는 뭐 그렇게 착한 사람이 되고 싶냐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몰라.


우리 엄마가 착한 사람이니까

딸인 내가 착한 사람이고 싶은 건

너무 당연한 일이잖아.


엄마, 어쩌면 앞으로도 나는

야무지게 따져 묻지도 못하고

나를 상처 입힌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미련하게 살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그런 나를

엄마는 응원해 줄 거라는 걸 믿어.

나는 엄마의 착한, 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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