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패션 감각이 꽤 괜찮은 일반인이었다.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지만, 명품이나 비싼 옷도 아니지만, 엄마의 착장은 화려하고 당당했다. 우리와 함께일 때의 엄마 사진을 보면, 고생 모르고 사는 사모님 같다. 엄마 옷장에는 기본 연식이 10년 이상이고, 15년이나 20년 가까이 된 옷도 있었다. 드라이클리닝도 안 하고 몇 벌 안 되는 옷을 돌려 입는데도 이상하게 보푸라기도 안 나고 때도 안 묻고 단정하니 깔끔했다. 젊을 때 큰 이모와 함께 의상실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원단을 볼 줄 아시는 건지, 내 옷도 엄마가 사주신 것은 10년 이상 괜찮았다.
나는 엄마의 맨얼굴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이미 화장을 마친 후이고, 화장을 지우자마자 방에 들어가 주무시니까 내 기억 속의 엄마 얼굴은 하얀 피부에 짙은 눈썹, 붉은 루주를 칠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사실 엄마의 화장품은 재래시장 화장품 가게 앞 바구니에 놓고 파는 싸구려였다. 1000원, 2000원 하는 매니큐어나 립스틱을 사서 쓰셨으니까. 엄마가 암으로 아프시고나서 딸 결혼식에 올 손님들이 없을까 봐 20여 년 만에 동창회를 가셨는데, 그때 차마 가방에서 팩트를 꺼내 화장을 고칠 수 없으셨다고 했다. 아무리 당당한 엄마라도 잔뜩 힘주고 나온 친구들 앞에서 시장표 화장품을 꺼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같이 사는 나니까 엄마 옷의 연식도 알고, 화장품 가격도 아는 거지 사실 밖에 나가면 엄마는 그냥 멋쟁이로 통했다. 그 가난한 변두리 동네 공장에서 일할 때도 30대의 젊은 엄마는 히피펌에 멜빵바지, 스카프까지 매고 출근을 하셨다. 엄마의 치트키는 바로 모자와 스카프였다. 무난한 옷에 포인트가 되는 스카프를 두르거나 계절에 어울리는 모자를 자주 쓰셨다. 그래서 더욱 화려하고 과감해 보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엄마의 그 당당하고 도도한 애티튜드! 엄마의 가난과 고통은 그녀의 패션에 가리어져 있었고, 그것은 엄마의 자존심을 지켜주었을 것이다.
문제는 화려한 엄마와 한없이 수수한 딸이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동생은 아버지의 우성 유전자를 물려받아 비율이 좋고 작은 얼굴에 오뚝한 콧날, 조화로운 이목구비로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다. 반면 부모의 열성 유전자를 몰빵 당한 나는 작은 키, 고도 근시로 인한 돋보기안경, 탄수화물 중심의 가족 문화로 인한 오동통한 몸매 등 강제로 수수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사춘기 때는 나도 좀 예쁠 수 없을까 고민도 했으나, 그때는 호르몬 때문에 개기름에 여드름까지 돋아나 몰골이 더 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집에 돈이 없으니 뭘 해볼 수가 없었다. 교복이 있다는 게 다행일 뿐이었다. 당시 친척 결혼식에도 교복을 입고 갔다.
엄마는 자기 딸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신 것인지, 자기 딸이라 그냥 고슴도치 사랑으로 품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나에게 신발, 가방, 옷 등을 사줄 기회가 오면 너무 유니크한 디자인을 골라 이목을 집중시켰다. 국민학교 때 처음으로 선물 받은 새 운동화는 새빨간 색상으로, 친구들이 당시 유행하던 임하룡의 빨간 양말에 빗대어 다이몬드 스텝 어쩌고 하며 놀려댔다. 중학교 때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채도의 밝은 파란 티셔츠와 폴란드도자기의 디자인을 박은 붉은색 반바지를 사주셨다. (엄마는 만족스러웠는지 저 티셔츠에 바지 입혀서 사진도 찍어 주셨다.) 고등학교 때 잔스포츠 가방 열풍이 불자 막내이모가 선물로 책가방을 사주었는데 엄마와 이모가 고른 색깔은 전교에 하나뿐인 밝은 겨자색상이었다. 친구들은 500미터 뒤에서도 내가 등교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내 얼굴과 몸매가 감당할 수 없는 착장으로 몇 번 유명세를 타고나니, 엄마는 그렇게 옷을 잘 입으면서 왜 나한테는 이러나 싶었다. 사실, 엄마처럼 예쁘지 못한 내 모습이 속상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엄마가 골라주는 투피스나 블라우스를 입었지만 나는 그런 내가 어색하기만 했다. 화장기도 없는 고등학생 얼굴에 어른 옷을 입혀 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엄마한테 입기 싫다고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더 과감한 옷을 골라 굳이 입겠다고 우겼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스무 살이 넘어 교복을 벗고 매일 옷을 골라 입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옷장을 열어 옷을 입고 와 쭈뼛거리며 엄마 눈치를 살폈다. "엄마, 이거 어때?" 하고 묻고 엄마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다른 옷을 입고 나갔다.
내 패션의 독립은,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난 이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엄마로부터 분리된 나 자신으로 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젖살이 빠지고 친구들에게 배워 화장도 하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하니까 제법 봐줄 만 해졌다.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끼고 미팅이나 소개팅에도 나갔다. 알고 보니 그렇게 못난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심지어 나는 꾸미는 걸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그 돈으로 옷을 사고 취향이라는 게 생겼다. 내 몸에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법도 배워 나갔다. 단점을 커버하고 내가 돋보일 수 있는 디자인을 고를 수도 있게 됐다. 연애를 하니까 남자 친구가 이쁘다고 해주고, 학교에 애들을 가르치러 가니까 선생님이 옷을 잘 입는다고 해 주고, 그러다 보니 나는 저절로 어깨가 펴지면서 그전에 없었던 당당함을 갖게 되었다.
엄마,
나는 엄마가 예뻐서 참 좋았어.
그래서 엄마를 자꾸 학교에 불렀잖아.
엄마를 본 친구들이
"너네 엄마 멋쟁이다" 하면
기분이 정말 좋았거든.
사진 속의 엄마는
예쁜 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어서
우리에게 마치 나쁜 일들은 없고
맨날 행복했던 것 같이 느껴져.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엄마는 더 행복하고 즐거웠을지도 몰라.
엄마는 부지런하고 당당한 사람이었으니까.
하루하루 열심히 자신을 가꾸고
집을 가꾸고 자식들을 가꾸고
세상이 아무리 엄마를 몰아붙여도
보란 듯이 이쁘게 살았으니까.
엄마,
내가 너무 못생긴 아가라서
엄마 등에 업힌 나를 보고
이모랑 삼촌이 원숭이 같다고 했다잖아.
그런데 엄마는 우리 딸은
귀엽고 매력 있다고 했지.
나는 진짜로 엄마의 기대에
걸맞는 딸이 되고 싶었어.
멋쟁이 엄마의 딸로 사는 거
사실 좀 힘들었거든.
세월의 흐름 속에
나는 나이 든 여자가 되고
앞으로 육체의 아름다움은
시들어 갈 일만 남았지만
이제는 다 괜찮아.
내가 가슴을 쫙 펴고
활짝 웃으면
우리 아이들도
엄마가 생각보다 행복하다는 걸
분명히 알 테니까.
그래서 애쓰지 않고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살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