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04 목요일 저녁
어젯밤 첫눈이 내렸다.
서울 지역은 ‘펑펑 내렸다’고 할 만큼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쏟아져 금세 소복하게 쌓였다. 아이에게 우산을 가져다주러 집을 나서며 뽀드득, 뽀드득—발밑에서 눈이 부서지는 소리를 조심스레 밟아본다. 아이들은 유난히 눈을 좋아한다. 우리 집 둘째는 “눈이 와서 겨울이 좋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눈을 마냥 반갑게만 맞이하진 못한다. 막힐 도로, 불편한 거리, “눈싸움 나가자”라고 성화인 아이들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먼저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심의 절반쯤 사라진 나조차도 첫눈은 좀 다르다. 마음 한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간질거림이 있었다. 첫눈 앞에서는, 우리 안의 어린아이가 다시 고개를 든다.
생각해 보면 첫눈에는 몇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첫째, ‘첫 번째’라는 말이 가진 유한성 때문이다.
인간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기에, 대신 나누고 묶고 이름을 붙인다. “2025년 겨울 첫눈은 12월 4일에 내렸다.” 이렇게 기록하는 순간, 시간은 개인의 역사 속에 자리한다. 해마다 첫눈은 오고, 사람들은 그 첫눈과 함께했던 사람을 기억한다.
나 역시 올해 첫눈을 아픈 손가락 같은 우리 둘째 준이와 함께 맞았다. 준이가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내년에도 씩씩하고 영리하게 학교생활을 이어가길 바라며 첫눈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 하나하나에 마음속 작은 기도가 실렸다.
둘째, 눈이 가진 ‘하얀색’ 때문이다.
하얀색을 유난히 사랑해 ‘백의민족’이라 불렸던 우리에게, 눈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다. 순백의 눈은 깨끗하다 못해 청초하고, 세상의 모든 빛깔을 잠시 쉬게 만드는 고요한 힘이 있다. 그 하얀색이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순간, 우리는 이유 없이 숨을 고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첫눈은 ‘세상을 덮어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 인간이 만들어 올린 기괴한 높이의 초고층 건물들, 거칠고 삭막한 도로, 차들의 지붕까지—모든 것이 눈 아래 잠시 동일한 표면이 된다.
땅 위에 존재하는 것들의 민낯은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진실은 때로 불편하고, 상처는 보기 거북하고, 관계의 단면은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첫눈이 내려 세상을 덮어버리면, 잠시나마 모든 결들이 흰색으로 가려진다.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이유다.
새벽, 동도 트지 않은 시간에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 글을 쓴다. 창밖은 아직 희고, 공기는 정적에 잠겨 있다. 이 고요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첫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내게 오건, 잠시 하얗게 덮어주고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 상처와 실수, 지친 마음까지 포근히 수용하는 존재.
자연은 늘 말없이 삶의 진리를 가르쳐준다. 사람들에게도, 관계에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첫눈의 방식으로 다가가고 싶다. 덮어주고, 기다려주고, 그 위에 새로운 발자국이 얹히도록.
“대자연의 어머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첫눈이 내린 아침, 자연이 건네준 조용한 가르침을 마음에 고이 접어 넣는다.
올해 첫눈이 내 마음에 남긴 말 —
덮어주는 사람이 되자.
하얗게, 따뜻하게, 묵묵히.
올해 첫눈은 준이와 함께 맞았다.
누군가의 하루를 덮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그 눈 속에서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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